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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슬라이드에 숨은 이야기

AI도 아직 못 해내는 영역

by 수풀림

"그 동안 사장님 결재 통과했던 PPT를 싹 다 ChatGPT에 넣으면, 알아서 잘 만들어 주려나?"

옆 부서 A팀장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본인과 해당 부서 직원들이 만든 PPT는, 매번 사장님한테 까여 계속 다시 만들고 있단다. 인내심이 바닥난 사장님은, 혼내다 말고 한숨을 쉬며 A팀장에게 AI를 적극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A팀장은 아무리 AI에 프롬프트를 입력해도, 사장님이 좋아할만한 슬라이드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려먼서 거의 PPT를 공장처럼 생산하고 있는 우리 부서(전략기획)의 AI 활용 꿀팁을 궁금해했다.

"번짓수가 틀렸어. AI 활용법을 묻기 전에, 슬라이드에 담길 본인의 의도를 명확히 해야지."

AI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그녀에게, 뼈 때리는 말을 날렸다. 최근 회사가 ChatGPT와 계약을 하면서, AI의 활용도가 훨씬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로는, 직급이 높을수록 ChatGPT가 '똥멍청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비중이 더 높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제대로 일을 못 시킨다는 것, 두 번째는 AI가 파악할 정보를 제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보통 임원들은 직원들에게 이런 식으로 일을 시킨다.

"김과장, 곧 4분기 리포트 제출해야 되는 거 알지? 이번에 사장님이 AI 활용 강조하셨으니까, 그 내용 좀 버무려서 잘 써봐요."

이 부서에서 3년 넘게 일한 김과장은, 상무님이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찰떡같이 알아 듣는다. 그러나 AI에게 이렇게 일을 시킨다면? 아마도 AI가 가져온 초안은 쓰레기통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

더 어려운 건 두 번째 문제다. AI가 내 일을 잘 하려면, 그. 그만큼 내 일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줘야 한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해결해야 할 문제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차라리 낫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상황, 고객 지각 변동, 회사 조직 개편과 조직 문화 등은 쉽게 정량화, 데이터화 되기 어렵다.


지난 주 동안 나는 각기 다른 주제의 PPT를 여러 개 만들었다.

본사 CEO의 방한을 앞두고, 다들 APEC 정상회담급 준비를 하는 중이다. 사장님 앞에서 여러 부서가 수 차례 리허설을 했다. 이 때는 발표 자료를 띄워 놓고 사장님과 임원진들의 피드백을 받는데, 리허설을 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졌다. 지난 번에는 B가 좋다고 하시길래 B를 표현했는데, 왜 B를 만들었냐고 버럭하셨다.

'사장님이 B로 하라면서요!'

이렇게 대들고 싶은 마음은 잠시 저켠에 넣어 두고, 지금 사장님이 원하는 방향성을 다시 확인한다.

"(슬라이드를 즉석에서 고치며)그럼 방금 말씀주신 대로 C안으로 다시 표현해도 될까요?"

사장님의 그날 기분에 따라, 중간에 갑자기 내려온 본사의 방침에 따라, PPT의 내용은 수시로 바뀐다. 중요한 메시지와, 슬라이드 순서와 길이까지도. 애써 PPT를 싹 다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일을 겪으며, 과연 AI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사장님의 미묘한 눈썹 움직임과 무거운 회의실의 공기를 읽고 반영하는 것 말이다. 수치화하고 언어로 풀어내기 힘든, '눈치'의 영역이라 하겠다.


우리 부서 사람들은, 회사에서 '그림 좀 그리는 사람'으로 불린다.

어떤 직원들은 PPT를 단지 '디자인'의 영역으로 치부해, 우리를 깎아 내릴 때도 있다. 하지만 만들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한 장의 슬라이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 이 슬라이드 안에 어떤 내용을 넣어야할지 고민하는 것부터, 그것을 어떻게 시각화 할것인가까지. 아니, 이보다 더 많은 것들을 파악해야, 타겟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CEO에게 발표할 자료를 만든다고 하면, 우선 CEO의 취향부터 파악해야 한다. 간결한 걸 좋아하는지, 숫자부터 나오는 두괄식을 선호할지, 리뷰 혹은 플랜 중 어떤 쪽의 얘기에 끌릴지 등등. 그리고 나서는 내가 하려는 얘기가 설득력 있도록 각종 리서치를 하고, 그것을 스토리에 녹인다. 이렇게 고심하고 만들어도, 막상 여러 사람 앞에서 다시 보면, 고칠 것 투성이다. 고려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인다.

내가 봤을 때 우리 부서 사람들이 가장 잘 하는 건,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데이터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찾아 그것을 녹여내는 능력이다.


우리 부서 사람들이 하는 일을 다시 정의해본다.

PPT를 그리지만, 사실은 청중의 생각을 번역하고 그것을 재해석하는 일이라고. 상대방의 보이지 않는 의도와 감정을 읽고, 그걸 시각적인 언어와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AI는 도표를 잘 그리고, 문장을 잘 만들지만, 아직 사람을 다 읽는 능력은 부족하다.

AI에 대체되지 않는 나의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 안의 맥락을 그림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닐까. 숫자와 문장 사이에서 숨은 의도를 찾아내고, 그걸 한 장의 슬라이드로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만드는 일.

AI는 정답을 그리지만, 나는 사람의 생각을 그리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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