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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Nov 04. 2024

완벽주의자를 위한 처방전

마감 시한이 답이다

아직 올해가 두 달이나 남았지만, 상사는 팀장들에게 다음 주까지 내년 사업 계획을 세워오라고 한다.

사업 계획은 PPT로 만들어 각자 발표하는 형식이다. 당신이 만약 이 숙제를 받았다면, 다음 중 어떤 것부터 시작할 것인가?

작년에 세운 올해 계획 복기하기

내년 계획의 키워드 잡아보기

전체적인 자료의 방향성 고민하고 목차 정리

내년에는 올해와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

정답이 따로 있는 건 아니며, 어쩌면 위의 보기 모두 다 맞는 접근일 수 있다. 내년 계획을 세우기 앞서 올해 잘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비교해 보며 개선점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이걸 교훈 삼아 다음 계획을 세우면 조금 더 나은 방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내년 계획을 어떻게 세울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중요한 단어 몇 가지를 키워드로 선정하면 시작이 수월해진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의 시작과 접근법은 정말 다르다.

그 예시인 '나'의 경우, 이 숙제를 받는다면 아마도 '완벽한 템플릿'을 찾거나 만드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머릿속으로는 위에 있는 것들을 먼저 해야만 알찬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먼저 예전에 만든 자료 중 비슷한 주제의 발표자료를 찾아볼 것이나, 보나 마나 내 마음에 들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이때부터는 구글창을 열고  'ppt template'을 검색해 본다. 만족할만한 이미지와 템플릿이 나올 때까지 계속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벌써 두 시간 정도 훌쩍 가있다. 다른 팀장들 자료를 슬쩍 훔쳐보는데, 거긴 글씨가 여러 개 적혀 있다. 템플릿은 신경 쓰지 않고, 내용부터 먼저 정리한 사람들이다. 그때부터 나도 무언가를 해야 될 것 같은 마음에 초조해진다. 그러나 이런 마음과는 달리, 내 손은 PPT 템플릿에 아직도 얽매여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표지 그림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찾아본다. 간신히 이 과정이 넘어갔다면, 그다음은 목차 페이지다. 목차를 3개로 할지 4개로 할지 고민하다가, 적절한 글씨체와 목차 템플릿을 찾느냐 오늘 하루 다 날리는 식이다. 스스로도 이런 내가 살짝 답답하긴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템플릿에 작성하느니 차라리 안 만들겠다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회사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여러 모습의 완벽주의자들이 주변에 보인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시작하기 위해 하염없이 '프로젝트 차트'만 계속 업데이트하는 동료도 있고, 고객과 완벽한 관계가 형성될 때까지는 절대 영업을 하지 않는 동료도 있다. 내일 고객과 중요한 회의가 있어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자료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 절대 지금은 보여주지 못하겠다는 동료도 있었다. 글로벌팀과 영어로 하는 화상회의에 완벽한 스크립트를 쓰지 않아, 두 시간 앞으로 다가온 회의를 미루면 안 되겠냐는 동료의 말에는 나조차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완벽주의자를 대표해 말해보자면, '잘하고 싶은 마음'과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돌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시작할 때는 포부를 크게 가지지만, 막상 하다 보면 마음만큼 잘 안된다. 분명 3시간 정도면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3시간은커녕 5시간, 8시간이 걸려도 결과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포부와 능력 사이의 갭이 큰 것이다. 내 능력을 제대로 보지 못한 '메타 인지'의 부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혹은 능력과 상관없이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면 이런 행동이 나타나기도 한다.


완벽주의를 조금 내려놓고 '완료'에 더 중점을 두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무려 17년간 깐깐하고 피곤한 완벽주의자로 회사 생활을 하면서, 매번 이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내가 내린 완벽주의에 대한 가장 잘 듣는 처방은 바로 '마감시한'이라는 약이다. 

아무리 완벽을 기하더라도, 마감시한이 바로 코 앞이라면 완벽은커녕 당장 제출하는 것에 더 의의를 둘 것이다. 첫 예시에서 언급한 '내년 사업 계획'을 만약 내일 제출하라고 한다면, PPT 템플릿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하얀 배경 화면에 3개의 주요 계획을 적는 데 집중할 것이다. 멋들어진 이미지와 세련된 글씨체는, 마감시한 앞에서는 사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직을 위한 면접이 내일 있다면, 완벽하게 보이기 위한 정장을 사는 시간을 할애하기보다는 면접 질문과 답을 달달 외우느냐 시간을 쓰겠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업무 시작 전인 오전 9시 이전에 글 하나씩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만약 이 마감시한이 없었더라면 하루종일 써도 일주일에 글 하나 올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뭘 써도 별로고, 이미지도 조금 더 잘 붙여 넣고 싶고, 다른 작가님들의 잘 쓴 글을 흉내 내느냐 말이다. 그러나 업무를 곧 시작해야 되면 마음이 다급해져, 지금이 순간에도 내용, 형식 별로 생각할 시간 없이 마구 써 내려가는 중이다.


마감 시한은 외부에서 주는 것과, 나 스스로 주는 것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물론 회사에서는 상사나 동료가 주는 외부 자극이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다. 그러나 개인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마감 시한 자체도 보통 내가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무시하게 된다. 나만해도 주말 동안 운동을 집에서도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으나, 애꿎은 TV만 보다가 소파에서 하루를 마감해 버렸다. 완벽하게 운동을 하지 않을 바에는 시작조차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나는 아직 시도해보지 못했지만, 이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과의 '챌린지' 앱을 통해 마감 시한을 정하면 도움이 된다.

완벽을 추구하다 보면 완성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 지금 당장, 조금씩이라도 움직여보자. 내가 불안하고 초조한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서라고 누가 그러더라. (완전 공감!)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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