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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Dec 17. 2024

오늘 주인공은, 무려 한우라고!

소소한 사치를 누린 날

"엄마, 우리 학원 옆에 거기 알아? 사람들 맨날 엄청 줄 서있어!"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쉬던 날, 아이의 학원에 데려다준 적이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딸이 저 가게 좀 보라며 흥분해서 창밖을 가리킨다. 마침 학원 시간도 넉넉히 남았겠다, 여기까지 온 김에 딸과 함께 가게로 향했다. 도대체 뭐 하는 곳인가 하고 가보니, 어라, 오후 4시에 가게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고 큰 현수막이 밖에 걸려 있었다.

'한우 도매가, 금토 3일 영업'

이 시간에 문이 닫혀 있는 것도 신기하고, 3일만 가게를 여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고 잘 팔리면 이렇게 영업을 할 수 있을까. 자주 이곳을 지나다니는 딸이 말하기를, 10명 넘는 사람들이 줄 서있는 날도 있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가게길래 인기가 이렇게 많은 건지 궁금해졌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 한우 가게 근처 한의원에 예약이 잡혀있던 토요일, 작정하고 9시 오픈런을 했다. 겨울인 데다 주말 이른 아침이라, 기다림 없이 바로 고기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코너에 위치한 가게 입구에 들어가기도 전, 수많은 인파를 목격하고 말았다. 어찌나 사람들이 부지런하던지. 내 앞에 무려 9명이나 있었다. 좁디좁은 가게는 총 4명의 젊은 청년들이 주문을 받고 고기를 썰어주는 공간만 존재했다. 가게 문도 없어, 셧터만 열면 뻥뚤린 정육점이 마치 오픈 키친처럼 펼쳐져 있다. 나는 미처 월동 준비를 못한 채로 나온 터라, 덜덜 떨며 기다리는데 생각보다 줄이 더디게 줄어든다. 다들 작정하고 이것저것 고르느냐 오래 걸리는 것이었다. 큼지막히 적힌 가격표를 보니, 한우 불고기감은 마트에서 파는 돼지고기보다 저렴하다. 채끝이나 등심도 다른 가게의 삼분의 일 가격밖에 되지 않는다. 내 차례가 되기도 전, 눈이 확 뒤집히고 전의에 불타올랐다. 여기까지 왔는데, 대충 아무 부위나 한두 개 사서 갈 수는 없다. 머릿속으로 착착착, 어떤 부위를 사서 뭘 해먹을지 그려본다. 드디어 내 주문을 받는 순간, 앞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망설임 없이 속사포 랩을 쏟아냈다.

"샤부샤부 한 근, 불고기감 한 근, 육회용 반 근, 양지 한 근주세요."

한우로 내가 이렇게 '플렉스'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냥 쓸어 담았다. 앞뒤옆을 쳐다보니 내가 그리 많이 산 것 같지도 않다. 아~~ 정말 만족스럽다. 이렇게 다 사도 5만 원 남짓이라 마음도 안심, 지갑 걱정도 없다. 


한우라는 전리품을 싸들고 양손 무겁게 집으로 와서, 의기양양하게 남편에게 소리쳤다. 오늘 저녁 제대로 먹을 각오하고 오라고. 나의 먹부림 욕망을 잘 아는 남편은 벌써부터 불안한 눈빛이다. 다른 사치는 안 해도 먹는 것에는 쉽게 지갑을 연다는 것을, 15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이미 눈치챘다. 대체 뭘 샀길래 저러나 싶어, 그는 냉장고 문부터 열어본다. 쌓여 있는 고기팩에 흠칫 놀라며,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애써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며 '설마 소고기는 아니지?'라고 되묻는다.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팔짱을 낀 채 기고만장하게 다시 말해줬다.

"오늘 주인공은 무려 한우라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 하는 탄식이 나왔다. 그다음은 폭풍잔소리. 퇴사를 한다면서 가정경제도 생각해야지 무슨 한우냐며 다다다 다다.... 퇴사를 번복한 사실은 아직 남편에게 털어놓지 않았지만, 퇴사와 상관없이 지금까지도 우리 집은 유독 한우만큼에는 인색하다. 가족 외식으로 한우를 먹은 적은 1-2년에 한 번 정도? 그것도 정량 1인분씩을 지키며, 자리에 앉자마자 밥이랑 된장찌개부터 시킨다. 혼자서 고기 1kg도 거뜬히 먹는 남편에게는, 오후 간식 정도의 수준이었으리라. 한우를 맘 편히 배불리 먹는 순간은, 명절날 시댁이나 친정에 가서 얻어먹는 딱 그때뿐이었다. 짠돌이 남편에게 한우를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것은, 길거리에 돈을 펑펑 뿌리며 사는 것과 마찬가지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저렴한 불고기감 봉지에 붙은 가격표를 보여주자, 남편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러나 저녁에 먹으려고 했던 샤부샤부용 고기가 무려 두 팩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가, 한팩에만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짓는다. 어휴, 절레절레. 마음 같아서는 확 굶기고 싶지만, 같이 살았던 정이 있어 참아본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오늘의 주인공인 한우로 밥상 겸 술상을 준비해 본다. 멸치와 다시마로 냄비 가득 육수를 내고, 제철 채소를 다듬는다. 메인 메뉴는 샤부샤부, 서브 메뉴는 육회. 주인공의 존재감이 워낙 크기에, 나머지는 평소보다 간단히 준비해도 된다. 각종 양념을 넣고 이것저것 볶고 지지고 할 필요도 없다. 육회도 아주 가벼운 양념으로 살짝 무쳐내, 보기 좋게 달걀노른자만 얹는다. 식탁에 준비한 재료들을 차려놓고 보니, 빨간 고기의 색감이 강렬하고 아름답다. 아니나 다를까, 식탁을 본 남편과 딸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와~~~ 고기다!"

그냥 고기 정도가 아니라, 엄마가 밖에서 20분을 덜덜 떨면서 힘겹게 쟁취해 온 한우라고 정정해 준다. 이 귀중한 한우를 표현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얇게 썰어 돌돌 말린 고기를 한 점씩 국물에 담가, 채소와 같이 호로록호로록 먹다 보니 금세 배가 불러온다. 집안은 육수에서 나온 열기로 가득 차, 한겨울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과 딸이 경쟁하듯 먹던 육회는 10분도 채 안되어 바닥이 드러났다. 총 1kg 남짓한 한우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뱃속으로 사라진다. 오늘 식탁의 주인공인 한우는, 그 자체만으로도 빛이 났다. 사실, 한우는 어떻게 먹어도 맛나다.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소금을 살짝 뿌려 구워 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사라져도 '오히려 좋아'를 외칠 판이다.  생고기를 가늘게 썰어 무쳐 먹는 육회도, 생선회와는 풍미가 다른  별미 중 별미다. 명절에 먹는 소갈비는, 외국 손님에게 대접하고 싶은 귀한 음식이 된다. 양지 미역국, 차돌박이 된장 등 국물 요리에 한우를 조금만 넣어도, 전체 요리의 맛을 확 끌어올린다.  볶음밥을 극혐 하는 딸내미도, 소고기를 넣은 볶음밥만큼은 귀신같이 잘 먹는다.


한우를 배 두드리며 먹고 나니,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주인공이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주인공이 되는 순간은 항상 피하고 싶다. 심지어 결혼식날 모든 눈들이 신부인 나를 향할 때, 부담감이 확 올라 도망가고 싶었다.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매 순간도 마찬가지다. 제발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기를, 이 관심을 안 받기를 희망해 본다.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공연을 하는 주인공들이 멋지고 부럽다가도, 저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라 선을 긋게 된다. 내가 저 무대에 올라간다면? 으~~~ 차마 상상도 하기 싫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될 자질은 따로 있을까?

한우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주인공'에 대해 고민해 보니,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우선 존재감. 주인공은 그 자체만으로도 내뿜는 매력과 아우라가 있다. 특히나 한우는 더 그러하다. 아까 말한 대로 그냥 그 자체로만 살짝 구워 먹어도, '음~~ 역시!'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하지만 곰곰이 돌아보면, 인생사에 주인공과 조연은 매번 바뀐다. 내 결혼식날은 내가 주인공이었다가도, 친구 아기 돌잔치에 가면 그날만큼은 1살밖에 안 된 조그마한 녀석이 주인공이다. 한우도 육회로 먹을 때는 주인공이지만, 국물에 넣고 끓여 먹으면 국물맛을 돕는 조연이 된다. 그러니, 지금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해도 기죽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한우로 시작했다가 주인공으로 글 끝맺음하기 무지 힘들다. 하하하. 이렇게 얼렁뚱땅 빨리 마무리하고 그만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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