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경험은 없다, 배움을 찾는다면

Lesson learned

by 수풀림

아래 세 가지 문장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김 부장 때문에 내가 헛짓거리 한 거 생각하면, 진짜 억울하다."

"내 전공은 참 쓸데 없이 느껴져. 지금 하는 일이랑 하나도 연관성이 없잖아."

"괜히 시작했나 봐.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이게 나한테 도움이나 될까 싶어."

이 문장들은 지난날의 선택과 경험을 '후회'하는 독백의 예시이다. 누군들 삶에서 후회되지 않는 순간이 있으랴. 특히나 일이 삶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직장인들에게는 유독 후회의 경험이 많다. 옆부서 이대리가 외국 바이어들과 소통을 잘해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영어공부 좀 해놓을 걸 하고 후회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친구들과 여행 다니느냐 바빴는데, 누구는 착실히 실력을 쌓아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 회사에서 한참 MBA 열풍일 불 때 큰맘 먹고 피 같은 돈과 시간을 들여 학위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온 건 MBA에 대한 우대가 아닌, 매일 반복되는 상사의 갈굼 뿐이다. 이게 과연 맞는 결정이었을까. 회한에 잠겨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도대체 뭐가 인생의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나에게도 비슷한 예시가 있다.

회사에서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생각했는데, 막상 나에게 남는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수풀림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에요?"

새로 부임한 상사의 당연하고 일반적인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겨우 대답한 거라고는, 자잘하고 반복적인 업무들의 나열이었다. 이렇게 답해놓고 나니, 내 일에서의 경력과 경험은 더욱 보잘것없어 보였다. 자리로 돌아와 내가 진짜 하는 게 없었는지 돌이켜 봤다. 불현듯 지난주 옆 부서 미팅의 퍼실리테이터로 참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서 내 불협 화음으로 고객사에 제안할 프로젝트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제삼자의 눈으로 양쪽 입장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들으며, 서로 타협안을 낼 수 있도록 조율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했다. 거친 표현 저 너머에 숨겨진 진짜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미팅도 잘 끝났고 화해의 실마리도 찾았다.

그러나, 내 경력 기술서에는 이런 미팅의 경험을 쓰기는 어렵다. 상사의 질문에, '제가 옆부서 미팅을 잘 도와주는 사람이에요'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태껏 나는 무슨 경력을 쌓았을까 다시 고민했다.


지나간 내 경험들을 떠올리니, 흑역사들이 많았다.

멋지게 퇴사한다고 사표를 던졌지만, 막상 백수생활을 시작하니 괴로웠던 경험. 그때 업계를 떠나 절연한다 결심하고, 그동안의 경력과 관계없는 것들을 배우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했던 건 아동미술심리치료상담이었는데, 너무 흥미 있어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 회사로 복귀해서도, 나는 일 말고 다른 것들에 눈이 돌아가 자꾸 기웃거렸다. 동기부여, 자기 계발, 심리상담, 코칭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이것저것 시도해 봤다. 이력서에 한 줄 넣기도 힘든, 경력의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고 헛된 경험이었다. 이런 것들이 내 연봉을 높여주는 것도 아니고, 상사의 인정을 단단히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경험들을 돌이켜보면, 전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동미술심리치료상담을 공부하면서 배운 마음에 대한 이해로, 동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조금 더 깊이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자기 계발을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며, 나에게 도움이 되는 아침 루틴을 잡아갔다. 코칭을 경험함으로써, 팀원들의 얘기에 더 귀 기울이게 되었다. 글쓰기를 하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이력서에 쓰지 않더라도, 나한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었다.


모든 경험은 소중하며, 배움의 과정을 걸쳐 결국 나의 자산이 된다.

그것이 비록 실패의 경험이라도, 그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경험이다. 중요한 프로젝트 발표를 망친 그 순간에는, 좌절감이 가장 크게 들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쓰라림이 무뎌지고 나면, 다음 발표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다. 실패의 경험이 내 자산으로 데이터 베이스가 되는 것이다. 영어 표현으로 하면 바로 'Lesson Learned'이다. 단순한 경험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고의 과정을 통해 배움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을 인생 자산으로 만드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글쓰기가 아닐까 싶다. 경험을 나열해 보고 내가 이 경험에서 배운 것들을 글로 정리하다 보면, 나조차도 몰랐던 이 경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충실히 하면, 그다음으로는 '경험들을 연결하는' 힘이 생긴다. 스티븐 잡스가 말한 'Connecting the dots'이다. 어떤 경험도 헛된 것이 없으며, 그 경험들을 연결하다 보면 인생의 나침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겠지만, 과정도 경험이라 생각하고 한 번 작게라도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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