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기 위해
살아가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여러 종류의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만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미친놈일 거라는 어머니의 말씀에는 한 점 틀림이 없다. 그냥 다정한 사람, 왜 저렇게 사나 악의로 가득 찬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등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나는 또 생각하게 된다. 이 땅 위에서 분초까지 들어맞진 않더라도 같은 세기를 사는 우리가 이렇게 다르게 커버린 이유는 무엇일지. 그래도 같은 사람이라, 어떤 사람이든 간에 아주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 사람은 특출나게 감정적인 거구나,’ ‘이 사람은 이런 부분에 열등감이 있나 보다,’ 오만하게 판단한다.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 지 몇백 년, 우리는 매우 몹쓸 사람의 괴이한 성격마저도 어떤 요인이 있었던 건지 생각해볼 만 해졌다. 한 인간의 성격과 이념은 외부의 커다랗거나 작은 충격으로 안으로부터든 밖에서든 두들겨지고, 구부러지고, 다시 펴져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람을 빚는 것은 그런 사소하고 커다란 폭발인지라, 대개 소설 속 등장인물의 감정은 세밀히 묘사된다.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에 자신과의 동질감을 느끼고 몰입할 수 있는 것을 현실적인 감정선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제일 ‘현실적인’ 등장인물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오베라는 남자’는 이따금 어이없었다.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만날 수 있는 오베라는 사람은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괴팍한 할아버지였다. 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은 후 자살을 결심한다. 자살을 결심했어도 당장 그의 삶이 바뀌진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도록 집을 수리하고, 신문 구독을 취소하고, 꼼꼼하게 유언장을 작성했다. 원래 무심한 사람이 좀 더 괴팍해진 것뿐이다. 조용하게 고독하던 그의 삶에 파르바네라는 옆집 이웃이 등장하면서부터 균열이 생긴다. 파르바네라는 작은 날갯짓이 불러온 소용돌이가 오베의 삶을 삼켜버린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후 눈물 나게 따뜻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중간중간 이 사람들과 나 사이에서의 거대한 벽을 느끼고는 했다. 일단, 첫인상과 동일하게 오베라는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괴팍했다. 그냥 괴팍한 게 아니라 사실 어떤 부분은 못 됐다고 생각했다. 남의 의견이 자신의 것과 다를 때 자기의 주장만이 그냥 다 옳고, 자신만이 세상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굴어 좀 꼴불견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합리적’이라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니까. 오베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 파르바네도 나에게는 좀 그런 사람이었다. 남의 삶을 존중하지 못하고 끼어드는 무례한 사람.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겠는데 오베의 입장에서 읽어나가는 내 입장에 참견하는 피곤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사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그렇게 이해가 잘 되지도 않았고, 읽으면서 가끔 화났다. 무례해서. 지나치게 개인주의 적인 내 사상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인 건 알겠는데, 마치 내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진짜 말 안 통하는 할아버지 같아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정상일 거라고 생각도 했다. 내가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니, 어떻게 보면 내가 오늘날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고 나 자신을 안심시키면서.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놀랐다. 오베라는 인물을 활자 속에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제일 ‘현실적인’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프레드릭 배크만이 쓰는 글 속에서 오베는 자기 자신을 나에게 납득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자기주장을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보통 문학에서의 등장인물은 설령 작가가 완벽한 악인으로 설정했더라도 몇 문장을 더 덧붙여 말하며 하다못해 어떻게 완벽한 악인이 되었는지 꼭 짚고 넘어갔다. 어떤 이유가 분명하게 존재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모든 작가가, 내가 쓰는 내 글 속에서조차 어떻게 그 감정이 조제되었는지 알려주고자 문장에 문장을 끼워 넣었다. 그래서 설령 그 글이 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호소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배크만은 제일 적은 단어로, 오히려 언급하지 않고 잘라냄으로 독자들에게 오베를 보여주고 그의 존재를 내가 사는 세상으로 구현해냈다. 굳이 모든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는 오베였기 때문이다. 글 너머 작가의 펜대에 의존하지 않는, 어쩌면 작가보다 먼저 이 세상에 발을 디뎠을 오베가 선명했다. 오베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면, 그는 그냥 결정했다. 나는 그의 통보와 결심을 읽으며 그의 삶을 따라갔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듯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은 원래 그런 사람들 천지니까.
한 사람을 사랑스럽게, 소중하게 여기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 하듯이, 오베라는 사람을 341쪽을 따라 읽으면서야 참 따뜻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종잇장 사이로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 삐딱한 인간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오베라는 사람은 뭐, 주변 사람에게 ‘조금’ 온화해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오베라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말을 건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파르바네’라는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컸던 걸까? 오베라는 사람이 이 모든 일을 겪게 된 이유는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의 유일한 이해자이던 아내 ‘소냐’다. 그를 향한 오베의 사랑 자체가 오베의 인생이라고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첫눈에 반해 오베도 다가가긴 했지만, 이상한 이웃 주민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인생에서 오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 단 한 사람. 그는 오베가 보여주지 않고 담아두기만 해도, 직접 헤집고 들어가 사랑하고 이해한 사람이었다. 파르바네는 이런 점에서 그를 참 닮았다. 물론 오베의 첫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지만, 오베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티 나지 않아도, 자기가 멱살 잡고 끌고 들어가 이해해볼 테니 꺼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다. 나보다 더 파르바네의 무례한 태도에 구시렁거리던 오베가 왜 그를 아끼게 되는지 이해 되는 순간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나를 알아줄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자신의 속에 불이 붙던 고드름이 맺히던 체온은 언제나 36.5도일 테고, 그 무언가는 내가 말로 내뱉는 순간에야 비로소 실체를 가진다. 내가 입을 열지 않아도, 눈물 흘리지 않아도,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무언가를 알아줄 사람. 모두 다른 이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대하고 기다린다. 오베에게는 소냐가, 파르바네가 그런 이였을 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인 오베를 그대로 껴안아 줄 사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오베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기에 나는 그렇게 기뻤다. 나는 오베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나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누구도 다른 이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완전한 이해가 36.5도의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리가 없다. 그래도, 내가 오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다른 이도 나를 온전히 이해할 리 없겠지만….
오베가 가진 정도의 따뜻함이면, 나도 내 소냐를. 오베가 가진 정도의 행운이면, 나도 내 파르바네를.
이 땅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어서.
오베는 그냥 그런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