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향한 마음이 아닌데
어느 고요한 밤, 새벽 한 시. 오전 내내 어린이 박물관을 다녀온 아이들이 너무 피곤했는지 둘 다 깊이 잠들지 못한 채 번갈아가면서 깨어나 엄마를 찾는 걸 겨우 재우고, 친구들이랑 술 한잔 하러 갔던 남편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만취가 되어 들어왔다. 애들이 잠 들고나서 시작한 집안일은 도무지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아 어느 정도 포기한 채 마무리하고 나니 이 시간이 되었다. 온몸이 고달프고 아파서 소파에 누워서 좋아하는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어보던 중, 요즘 유난히 뾰족한 나의 심리 상태를 한번 되돌아보았다.
이 날 낮에 만난 어떤 아이 엄마가 나에게 크게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모임에서 간간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나는 사이었다. 큰 사건도, 딱히 어떤 문제도 없었지만 그냥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의 흐름이 부드럽지 못하고, 별 이야기가 아닌데도 나와 동의하지 않는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최근에 만났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생각해 보니 표정도 어두웠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아주 미세한 말과 행동들이 있었다. 특히 그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계속 귀에서 맴돌았는데, 직접적으로 나를 겨냥한 말도 아니었고, 특별히 나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 날 나에게 전달한 그 말들에서 나오는 기운이 내 감정을 툭 툭 계속 건드렸다. 처음엔 내가 예민한 건가 했지만 곧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엄마는 나를 만났을 때 심리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진다는 것을.
육아가 지치고 힘들 때 누군가 나에게 느낌이 쎄하게 말한 것들을 마음속에서 내보내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곱씹고 싶지 않은데 집안일을 하는 순간이 그렇다.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집중해서 일을 하다 보면 잊어버릴 아주 소소한 말들까지도 주부로 살면서 집안일을 할 땐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돈다. 설거지를 하는 순간, 빨래를 정리하는 순간, 청소기를 돌리는 순간들에 무슨 긴장감이 필요하고 집중력이 필요한가. 그냥 매일 기계같이 일을 할 때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주부들의 우울증이나 조울증은 이렇게 늘 똑같지만 안 하면 엉망진창이고, 열심히 하면 본전 정도인 반복적인 일을 하기 때문에 어떤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그 사람의 심리 상태가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어 옮겨져 있었다. 내 마음은 온통 꼭 뾰족한 송곳에 살짝살짝 닿는 손가락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촉감처럼 예민해져 있었다. 눈치채기 어려웠던 나의 작은 감정들이 서서히 올라오며 내 마음을 살살 긁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신경이 제법 날카로워졌을 때, 작은 아이의 방에서 ‘응애’ 하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분리 수면 교육을 철저히 한 나는 단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행동을 멈추고 정적을 유지했다. 또 한 번 ‘응애’라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조용히 나온 말.
“아, 짜증 나.”
말을 뱉는 순간, 바로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네가 울어서 짜증 난 게 아닌데. 끊이지 않는 집안일에 많이 지치고 힘든 나의 육체적인 피로에, 오늘 만났던 엄마로 인해 온갖 자질구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막 치고 올라와 예민해져 있었던 것뿐인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이 향한 곳은 꼭, 나의 천사 같은 둘째 아들에게 향했던 것이다. 분리 수면 교육을 철저히 한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았고, 아이는 곧 잠들었지만, 나는 그 말 한마디를 내 입 밖으로 뱉음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이 마구마구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듣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결론적으로는 하루를 꾹 참고 버텨냈고, 나의 감정을 컨트롤 했음에도, 내 아이의 울음소리에 나는 아이에게 짜증을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뾰족해진 내 마음의 송곳이 향했던 곳은 우리 아들이 아니었는데. 네가 아니었는데. 오늘 밖에서 만나고 온 그 엄마의 뾰족한 심리 상태는 곧 나의 송곳이 되어 내 아들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선에서 처리했어야 하는 사소한 감정들은 한 살 밖에 안된, 오늘 열심히 걸음마를 하느라 피곤했던 내 아들에 전달되었다. 천사 같은 아기가 무슨 죄란 말인가.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아 미안해. 뾰족해진 엄마의 마음의 송곳이 향한 곳은 네가 아니었단다. 너를 향한 게 아니었단다. 밖에서 받은 부정적인 감정을 내 속에서 해소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혹은 몇 배로 네게 전달하지 않는 엄마가 될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그 감정을 빼도록 할게. 수 없이 다짐하며 잠들도록 노력해 보는 밤, 이래서 사람을 가려서 만나야 하는 거구나. 내가 밖에서 만나고 온 사람의 미세한 감정이 나를 통해 내 입으로 내 자식들에게 전달되는 거구나. 아무 죄 없는 네가 엄마의 뾰족해진 마음의 송곳에 찔리게 되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