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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헤더 Mar 15. 2024

육아 번아웃이 와버렸네

분명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닌데

내가 무슨 색 옷 입는 걸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디저트를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면 잘 웃는지, 내가 가고 싶었던 여행지는 어디였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요즘.

육아 우울증인지 육아 번아웃인지 내 상태를 알기 위해 자가진단 테스트들을 찾아 체크를 해봤다. 

다행히 우울증은 아니고, 번아웃이었다.


약속 장소에 계속 늦게 도착하고, 주차장에서 차에 타 시동 거는 그 순간들이 다 버겁게 느껴지고, 누구보다 외향적인 성격인데 사람들을 전혀 마주하고 싶지 않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아무런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여행에 대해 이야기해도 전혀 기대감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내 삶에 전혀 기대를 하지 못하고 있구나.  내 삶에 대한 흥분감, 기대감, 설렘 같은 느낌이 없구나. 심지어 긴장감이나 두려움마저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적인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매일 내 눈앞에 닥친 집안일들과 아이들 학교와 하교 후의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라이드를 하다 보면 어느새 밤 12시가 되어 있고, 부랴부랴 씻고 잘 준비하고 누우면 1시가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늦게 잠들면 나는 또 4-5시간만 자고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일기장에 글 한자를 쓰고 싶어도 잠이나 자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미국살이가 좀 고되다고 느껴졌다.  한국에서 너무 당연한 셔틀 같은 게 없고, 코너마다 상가가 있고 상가마다 반찬가게가 있는 한국과는 너무 다른 시스템이니까.  김치 하나를 먹고 싶어도 20분에서 30분 운전해서 나가야 하니 그냥 하루종일 차 안에서 살고 있단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어떤 날은 하루에 이 도시를 4 바퀴를 돈 적도 있으니 주부, 엄마라는 직업이 이렇게 운전을 많이 하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작년에 내가 계획했던 것들, 올해 내가 해내고 싶었던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렇게 애들 밥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재우고, 빨래하고, 널고, 말리고, 정리하고, 운전하고 등 무한 반복적인 일들을 스스로 해내야 하는 상황이니 그 어떤 목표를 가져봤자 난 제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거니까.  내가 매 순간 희망을 가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신나게 만드는 노력조차 에너지 소모라고 느껴졌다.


아이들은 너무 예쁘고, 감사하게도 친구들 문제도 없고, 발달 문제도 딱히 없으니 이렇게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회에 적응을 잘하며 커주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다.  나의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늘 난 감사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남편과도 사이가 좋고, 서로를 응원하며 의지하고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하고 나 역시 안행복한 것이 아닌데.  분명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많고 그 찰나를 기억하기 위해 늘 노력하는데, 이 것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 내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와는 다른 문제였다.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의 자유시간이 생기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자유시간이 생겨도 쉬지를 못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육아와 집안일을 잘 해내고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내 자유시간들 마저도 결국 아이들과 관련된 일에 쓰게 돼버렸다.  결국 온전히 나 혼자서 쉬는 시간은 몇 달 동안 없었던 것 같다.  '쉼'과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데, 나는 나만의 시간이 생기면 나의 커리어를 찾는 일에 쓰고 싶었고, 나만의 것을 차곡차곡해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조급하기만 했다.


다 잘 해내고 싶은 게 문제.  아이들도 살뜰하게 다 챙겨주고 싶고, 첫째를 챙기는 만큼 둘째도 똑같이 잘해주고 싶고, 집안일도 미루지 않고 제 때 제 때 해놓고 싶고, 내 커리어도 찾아가고 싶고, 자기 관리도 잘하고 싶은 이 욕심이 나를 이만큼 갉아먹었다.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과감히 내려놓는 엄마들을 보며 그것을 부러워하고 있는 나를 보니 나는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 잘하려고 하니,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할 거야 라며 스스로에게 독설을 해봐도 그중 무엇을 내려놔야 하는지 조차 전혀 모르겠으니, 답이 없는 질문만 계속할 뿐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니 이지경이 되었다.  무감각 상태. 몸은 무한정 움직이지만 정신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있는 그런 상태.  이 육아 번아웃을 잘 이겨내고 싶다.  잘 이겨내서 다시 희망차고, 에너지 넘치고, 추진력 있고, 목표가 분명한 그런 나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한 시간 잘 시간을 포기하고 이렇게 노트북을 켜고 브런치에 들어와 조금이라도 글을 쓰는 시간을 낸 나에게 결국 너는 계속 잠자는 시간을 포기하는 거구나 라며 쓴소리를 하고 싶지만, 이렇게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잠도 푹 자지 못할 것 같았다.


다 잘하고 싶어 괴롭다.  다 해내고 싶어서 그 마음이 나를 이렇게 피를 말린다.  결국 같은 곳에 서 있으면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다.  매일매일 같은 곳에서 똑같은 상태로 반복적인 행동만 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그냥 답답하다.  너의 역량은 이것뿐이었니 라며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어서 이 무기력함과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내가 되도록 더 지독하게 노력하는 내가 되고 싶을 뿐이다.  난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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