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맛

황해도에서 미국까지

by Sho

점심을 먹고 겨울 해가 뉘었 할 때 출발했는데 북한산 바로 밑 주택가에 도착한 건 깜깜한 밤이었다. 택시에서 엄마 손을 잡고 내리니 그 새 눈이 많이 쌓여서 걸을 때마다 푹푹 다리가 빠져서 금세 신발도 두꺼운 바지도 처럭처럭 젖어서 걸음이 더 무거웠다. 초저녁 겨울의 할머니네 골목길은 춥고 인적도 드물었다. 엄마가 반대쪽 손엔 남동생 손도 잡고 낑낑대며 발걸음을 옮겼을 텐데, 내 기억엔 잘못 디디면 그대로 눈 속으로 끝도 없이 빠져버릴 거 같은 어둡고 깊은 내 발 밑 눈 쌓인 골목길 밖에 기억에 없다. 그다음은 대문도 마당의 기억도 없이, 노란 백열등이 따뜻하고 환한 할머니네 집 방안 구들장 위에서 놋쇠 소반에 받은 뜨끈한 만둣국상이다. 만둣국도, 갓 지어 김이 모락 하며 쫀득한 흰쌀밥도, 모두 은은한 광채를 안으로 품고 있는 둥근 곡선이 자애로운 놋그릇에 담겨 있었다. 외할머니의 만둣국은 양지머리에 마늘과 파만을 넣고 아침부터 푹 고아 고릿한 고기 냄새가 짙이짙은 국물에, 조물조물 간장 깨소금 양념해서 얹은 고기만을 고명으로 얹은 단순하고도 우직한 모양새다. 거기에 아삭하면서도 탄산수처첨 톡 쏘는 그렇게 빨갛지 않으면서 알맞게 익은 시원한 황해도식 김치나 뽀얀 국물에 오로지 하얀 무만 동동 떠서 청순해 보일 지경인 시원한 동치미가 곁들여 있다. 그날 난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만둣국을 세 그릇이나 청해 먹고 아랫목에 깔려있어서 따끈해진, 버석버석 소리를 내는 동굴 같은 광목 솜 누비이불 속에 다리를 넣고 잠이 들었다. 우리 강아지 그렇게 배고팠었냐고 애틋 대견해하는 할머니의 목소리만 기억에 남고, 엄마와 동생, 이모가 무얼 옆에서 드셨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에 하나도 없다.


우리 집은 아빠의 직장이 있던 안양시였고, 할머니는 북쪽 끝 강북구 우이동에 살았기 때문에 엄마가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친정을 방문하려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도착하면 세 마리의 스피츠 개들과 뒷산이 연결된 마당이 딸린 할머니네 양옥식 주택의 오후는 여느 시골집 못지않게 노곤했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은 종류가 많지가 않아서 내 기억엔 그냥 한 달에 한번 정도 갈 때마다 똑같았다.

메인은 주로 진한 양지머리 고깃국, 혹은 거기에 만둣국. 고기, 김치, 두부가 듬뿍 들어간 만두는 피부터 집에서 반죽해내서 겉은 쫄깃하고 속은 실하고. 김치를 많이 넣고 숙주나 고사리를 넣은 어른 손바닥만 한 이북식 녹두부침개. 얇게 포를 뜬 소고기에 소금과 후추로 살짝 간을 한 후, 밀가루와 달걀로 부쳐낸 육전, 여름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노란 늙은 호박김치로 만든 새콤 매콤한 김치찌개. 김치류는 겨울이면 꼭 나오는 아무것도 없이 무만 둥둥 떠있는 하얀 동치미와 아삭하고 시원한 이북식 겨울 김치. 그리고 부엌 바닥에 보자기를 펼쳐놓고 체로 치고 물 주기를 할 때면 나도 개들도 숨죽여서 지켜보던 하얀 백설기는 첫눈처럼 소복하고 파삭댔다. 그 단순한 레퍼토리를 나는 할머니가 아파 누우셔서 음식을 못하게 되신 스무 살 무렵까지 끝도 없이 먹었고 한 번도 물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엄마가 몇년전에 정리를 하다 발견하셨다면서 할머니 젊었을 때 흑백 사진을 보여주었다. 머리를 쪽진 젊은 새색시가 벨벳 의자가 놓인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모양인데 표정은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수줍은 가운데 단단해 보이는 입매와 손끝이 인상적이었다. 평범한 농부의 딸이었던 외할머니는 이미 중년의 나이에 상처하고, 재혼 자리를 찾는 황해도 만석꾼 외할아버지한테 시집을 가셨다. 늙고 돈 많은 남편은 어린 부인에게 딱히 다정하지도 않았고, 옷도 항상 중년 부인이 입을법한 칙칙한 색깔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나마의 풍요로움도 얼마 못 가서, 해방이 되고 625가 터지면서 외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 내려와 있다 과부가 된 할머니는 호강도 제대로 못해보고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되셨다. 그나마 남은 서울 집을 밑천 삼아 떡방앗간도 하고, 택시 한 대, 낡은 버스 한 대를 굴리는 나름 운송사업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차가 귀해서 한 대만 가지고도 차주 노릇을 했는데, 운송업자 모임을 가면 할머니 혼자 여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남자들이나 해봄 직한 일을 하며 가장 노릇까지 하면서 바쁘셨지만 아이들 교육과 먹는 것에 만은 충실하셔서, 할머니는 단순하지만 좋은 재료로 만든 실속 있고 진한 밥상을 차리게 되었다. 그 우직한 밥상이 그렇게 맛있고 진했던 건, 국물 반 고기 반으로 끓인 고깃국이나 물보다 무가 많은 동치미 덕분이었던 것을 나중에 엄마 말씀을 듣고 알았다.

그런 과부 할머니의 밥상을 이어받은 건 우리 엄마다. 70년대 생인 나는 엄마 아빠 쪽을 통틀어 외할머니만 한 분계셨다. 그때는 6.25 때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신지, 북에 계신지, 모르는 조부모를 가진 친구들도 많아서 그게 그냥 자연스러웠다. 외할머니의 막내딸이었던 우리 엄마는 과부가 힘들게 키운 5남매의 막내딸이었지만 할머니와 같이 사는 시집 안 간 이모를 빼고는 위로는 모두 외국에 나가 살았기 때문에 엄마도 나도 우리 할머니를 많이 독차지했고 분위기는 조촐했지만 그게 하나도 외롭지는 않았다. 외국에 나가서 살았던 며느리나 딸들, 독신으로 평생을 산 딸 등 각자의 이유로 다른 자식들은 할머니의 손맛을 재현해 보려 하지 않았고, 막내딸인 우리 엄마가 그 손맛을 이어받았는데, 무슨 사명감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엄마도 나와 내 동생을 먹이려고 하시다 보니 머리와 혀끝과 손끝에 밴 할머니의 밥상이 저절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다만 느끼한 건 배척하고 새콤 상콤한 걸 좋아하는 우리 엄마의 만두엔 김치가 더 많이 들어가서 개운하다. 고깃국도 엄마는 양지머리 양을 줄이고, 무, 양파 등을 더 넣고 개운하게 끓이신다. 그래서 엄마의 만둣국은 그 국물이 만두를 압도하지 않고 바탕이 되어준다. 만두의 사이즈 또한 자그마해서 후룩후룩 먹어 넘기면 편안하게 배가 부르다. 시댁도 남편도 없이 다만 교육시키고 먹고살기 바빴던 할머니와 달리 체면이 중요한 경상남도 시골 양반댁 맏며느리가 된 우리 엄마 만둣국엔 샛노란색 하얀색 가늘게 썰린 달걀지단과 김, 굴까지 고명으로 얹어져 있다.


우리 엄마의 그 만둣국은 지금은 내 딸이 여름에 한국을 갈 때마다 가장 애정 하는 만둣국이다. 엄마 옆에서 만두나 빚어봤지 속을 만드는 건 해본 적이 없는 내가 만두를 떨어뜨리지 않고 줄기차게 만들어 냉동실에 쟁여두는 건 나도 아이를 낳고부터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나올 때까지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받아만 먹었지, 만두를 직접 만들어보려고 한적은 없었다. 희한하게도 나의 첫 만두는 중국 친구들과 빚은 만두였다. 학생 때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만두는 단순했다. 주로 명절날이나 시험이 끝나고 모두가 모여 만두를 만드는데 그러니까 그건 깔깔 웃어대고 수다를 떨며 요란하고 풍족하게 만드는 파티음식 같은 거였다. 남녀 구별 없이 만두소와 만두피 반죽을 같이 만들어 놓고, 누구들은 옆에서 계속 만두피를 굴려내고, 누구들은 빚고, 한쪽에서는 끓는 물에 넣어 계속 삶아댄다. 속은 주로 돼지고기, 그리고 야채 한 가지였는데 다진 당근이나 배추가 들어갔다. 웃고 떠들며 배 터지게 만두를 나눠먹고 남은 만두는 삶긴 채로 나눠갖고 헤어진다.

요새도 귀찮은 날은 나도 그런 단순한 만두를 빚는다. 고기랑 다진 야채 하나만을 넣은 만두. 고기도 되는대로 있는 걸 넣는다. 소고 기반 돼지고기반. 때로는 닮고기에 배추. 닮고기에 오이를 넣는 여름 만두를 편수라고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어떤 땐 동네 칼국수 집에서 먹었던 거 같은 만두를 빚는다. 마당에 잡초처럼 자라는 부추를 뽑아다 찹찹다져서 돼지고기랑 당면 삶은 걸 넣고 빚어서 찐만두. 그러나 제일 자주 하는 건 역시 우리 엄마식 만두 아니, 할머니식 만두이다. 내 딸이 좋아해서 이다. 새콤한 김치가 많이 들어간 고기만두를 푹 고아낸 고깃국에 끓이는 것이다. 여기 미국 고기로 국물을 내자면 끓여도 끓여도 국물이 투명하고 내 기억 속의 그런 구수하고도 콤콤한 할머니 국물 맛이 나지 않아서 더 많은 고기를 넣고 푹 끓여낸다. 거기에 나는 근처 중국 마트에서 산 녹두를 불려서 갈아 만든 녹두부침개랑 같이 상을 차려서, 할머니와 엄마의 밥상을 흉내 낸다. 아마 내 딸은 이다음에 심심하고 맑은 미국 양지머리 국물에 끓여낸 국물에 멕시칸 이민자들이 만들어 한국 마트에 공급된 김치가 들어간 만두와 녹두부침개를 기억할 것이다. 딸이 좀 더 크면서는 만두를 같이 빚고 있다. 아이가 더 크면 만두소도 같이 만들 것이다. 두부에 물기를 짜내거나 김치를 다지는 단순한 것부터 시킬 수 있겠지. 할머니는 자식을 많이 두셨지만 그중에 한국에서 자란 손녀는 나 하나, 음식의 이어받은 사람도 우리 엄마의 딸인 나 하나다. 내가 따로 부담을 주지 않아도 이미 그 맛을 음미할 줄 아는 내 딸은 요리를 좋아하니까, 한국에 계신 지 할머니의 음식을 기억하며 내가 하는 데로 미국에서 이 맛을 만들어 낼 거다. 그럼 그건 전통의 변질일까 진화일까.


얼마 전에 한국에 있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만두 이야기도 나왔다. 난 아무리 해도 엄마 만두 맛이 안나. 애가 할머니 만두랑 엄마 맛이 좀 다르다네. 요새는 찹쌀 왕만두피가 잘 나와서 미국에도 한국 마트 가면 있고 그걸로 하면 만두 빚는 것도 금방이라고 그렇게 알려드렸다. 그런데 엄마 만두는 왜 속도 많지 않고 자그마하지? 엄마 말씀은 나와 내 동생이 바쁜 입시 동안 얼른 끓여서 후룩후룩 먹으라고 작게 만드는 거였단다. 만두가 크면 오래오래 푹 끓여야 하니까 기동성이 떨어졌단다. 오래 끓여서 불어 터진 만두를 먹이도 싶지 않으면서도 바쁜 자식들이 얼른 갓 끓은 만두를 먹게 하기 위안 엄마의 배려였던 거다. 그것도 모르고 요샌 왕만두를 빚으며 쉽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 만둣국처럼 아직은 덜 깊은 엄마인가 보다.

엄마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드셔서 걱정이다. 언젠가 외할머니가 아프시면서부터 엄마가 음식을 많이 해서 날랐던 거처럼 나도 해 드려야 할 텐데 바다 건너 너무 멀리 살고 있어서 걱정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리 엄마와 손맛이 같은 사람으로서 나는 그럴 의무가 있다. 내 손맛은 우리 엄마 손맛이고, 엄마 손맛은 엄마의 엄마 손맛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