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래 사랑. 목숨이 여러 개인 줄 알고 목숨을 건 사랑도 하고, 꿈도 꾸고 밤을 새워 친구들과 대화도 하고 여행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고 말이지. 그리고 영화를 시작할 때 누구의 돈으로 시작하려거든 그 생각부터 빨리 버려. 일단 저예산으로 단편영화부터 시작하는거야. 최소한의 인원으로 할 수 있는 시나리오부터 써봐.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첫 장편영화 데뷔를 한 류승완 감독 알지? <현대인>으로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거든? 첫 장편영화에 주인공으로 누굴 캐스팅했는지 아니? 바로 자기 동생 류승범이야. 심지어 자신도 석환 역으로 출연하지. 이 영화로 무명이었던 류승범은 수많은 히트작품에 출연하기도 해. 그후 류감독은 <베를린>이나 <베테랑> 같은 대작을 연출하게 되거든. 나는 현오가 류감독 같은 분 연출부로 일하며 영화수업을 받았으면 좋겠다. 실무를 익혀야 시행착오를 줄이거든.”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현오야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준비된 가족>인 건 알겠는데 너무 무거우면 밀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시나리오를 손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시간을 들여 각색해나가면 더 완성도 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어. 그때까지는 다른 아이디어가 생각나는 대로 작품을 써나가면 돼. 망설이지 말고 쓰는거야. 그리고 혼자만 읽지 말고 사람들과 같이 읽으렴. 그럼 수정할 부분, 인과관계, 완급조절에 대해 안 보이던 게 보일테니까.”
“<준비된 가족> 말고 <밤 도깨비 가족>, <제멋대로 가족> 시리즈가 있기는 한데 이것도 쓰다 말았어요.”
“그래? 그 작품도 완성되면 보고 싶은데. 어쩌면 이 세 가족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묶어서 잘 엮을 수도 있겠지. 세상에는 다양한 가족이 살고, 가족 아닌 사람들끼리 정을 나누며 살기도 하고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상태로 끝나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감독님은 제 나이 때 어떤 영화를 주로 보았어요?”
“닥치는대로.”
“예?”
“다 봤어. B급 영화도 보고, 예술 영화, 대중영화, 서부영화 가리지 않고 다. 동시상영관이라고 들어봤지? 한번에 두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그때는 영화관에 한번 들어가면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봐도 나가라고 하지 않아서 좋았어. 같은 자리에 앉아서 보고 또 봤지. <캣피플>이 연소자관람불가인지도 모르고 고등학교 때 보러가서 이건 좀 야한데 하고 좋아했고. 운이 좋으면 뮤지컬 영화를 볼 수도 있었지. <올 댓 재즈>라고 본적 있니? 난 그 영화를 좋아했어. 춤과 음악이 함께하는 영화들.”
“아, 티브이에서 본적 있어요. 주인공이 마시던 발포 비타민이 너무 먹어보고 싶게 했던 영화였어요.”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 를 연출한 밥 포시의 자전적 이야기인데 <시카고> 제작 당시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넘긴 자신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 영화 전편에 어떤 긴장감과 허무가 동시에 깃들어 있어서 좋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진정으로 추구하던 걸 잃어버린 자의 부스러지는 자아도 아름답게 보여주고 말이야. 슬프지만 아름다웠어.”
“저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을 좋아해요.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도 좋아해요. 저는 그런 영화 감수성이 좋아요. 감독님과 영화 이야기를 하니까 여러 가지 구상이 떠오르는데요. 오늘 밤 쓰다 만 시나리오를 다시 써봐야겠어요.”
“그래? 그렇다면 그 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자리를 피해주어야겠는데.”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알아. 사실 할 일이 좀 있어서 이제 가봐야해.”
나는 조금 걷고 싶었다. 현오의 모습 속에는 나의 옛날이 석화되어 있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잊었던 영화에 대한 욕망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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