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저귀를 갈고 있을 때였다.
“물을 다오.”
엄마가 말했다.
이 때 증손자 정명이(13살) 냉장고에서 물병을 들고 와서 침대에 누워계신 할머니께 빨대로 물을 드렸다. 일회용 비닐 장갑을 벗고 물을 드리려던 난 잠시 아이의 옆 얼굴을 보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코를 막거나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는 표정도 없이 할머니의 기저귀 케어를 하는 내 대신 침대 곁에 서서 할머니가 물을 다 드실 때까지 기다려주는 아이의 모습은 종교적이기까지 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것. 그 단순한 행동에서 ‘돌봄도 학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 딸이었다. 일 하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키워주셨는데 치매로 3년 동안 아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3년 동안 이모가 집에서 할머니를 돌봐드렸을 때 이렇게 말했다.
“너도 할머니가 키웠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할머니를 돌봐라.”
그래서 그렇게 했다.
어쩌면 내가 요양보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돌봄은 그때 이모에게서 배운 돌봄의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치매 할머니를 이해하고 좋은 돌봄을 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을 때 할머니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얇고 주름진 피부도 그립고, 다정한 미소도 그리워서 나는 할머니가 많은 곳, 데이케어센터에서 목욕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목욕 봉사에서 나는 내가 돌봄에 최적화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보통 목욕을 안 하시겠다고 거부하신다. 옷 벗기는 거 싫다고 할퀴고 때리기도 하는데 그때 어르신이 좋아하는 것이나 소중한 물건을 손에 쥐어 드리고, 양손에 물건을 들고 계실 때 하의부터 탈의를 도우면 그 다음 씻겨드리는 게 가능해진다. 어르신들의 목욕을 도와드리고 손발톱을 깨끗이 정리하고, 원예 시간에 흙을 드시지 않는지 돌보는 동안 나는 자신의 외로움이나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직업인 책 번역을 끝내고 느꼈을 때와 같은 충만함을 경험했다.
기저귀 케어의 기쁨
번역을 주 업으로 했던 나지만, 번역료만으로는 생활이 유지되지 않아서 공항 면세점에서 일 한 적이 있다. 아픈 남동생 대신 조카들의 학원비도 내야하고, 생활비도 생각보다 많이 들어서 늘 투잡, 쓰리잡을 했었다. 면세점에서 일하다 쉬는 시간이면 31번 게이트에서 노트에 번역을 하고, 쉬는 날은 데이케어센터에서 봉사를 하며 보내던 어느 날 근무하던 면세점이 리뉴얼에 들어가 일을 쉬게 되었다.
마침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공부하는 곳이 집 근처에 있어서 요양보호사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되었다. 요양원에서는 어르신을 돌보면 욕창에 걸리지 않게 2시간마다 자세를 변경한다. 기저귀 케어를 하며 엉덩이에 로션을 바를 때가 가장 좋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저귀 케어를 기꺼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꼭 한다.
일단 체위를 변경하면서 스윽 스캔을 한다. 등을 보고 살이 눌려있으면 두드려서 순환을 시켜주고, 옷 주름도 펴드린다. 소변이 워낙 독해서 염증 생기지 않게, 바람 쏘이고 엉덩이 두드리면서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그때 가장 많은 소통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기저귀 케어를 힘들어서 어떻게 하느냐고 하는데 아이를 키울 때처럼 힘들지만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엉덩이에 기저귀를 채울 때 엄마가 기분이 좋듯 힘들어도 나름대로의 일하는 기쁨이 있다.
돌봄이 일상의 일부가 되는 과정
13살 정명이와 잠들기 전에 매일 보고 자는 유투브가 있다. ‘시골 청년’이라는 유투브인데 치매 할머니와 손자가 단둘이 살며 일어나는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골 청년은 할머니가 아무리 같은 말을 반복해도 그때마다 싫은 내색 없이 반복해서 알려주고 대답을 한다. 당신 이름도 잊어 가고, 가족인 건 아는데 손자인지, 그 손자 이름이 무엇인지도 잊을 때도 여러 번 웃으면서 알려주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새긴 티셔츠를 주문해 입고 다닌다.
몇 달 전만 해도 할머니와 살기 싫다고 했던 정명이의 지나가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적이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할머니가 있는 집에 오기 싫어서 밖에서 놀다 오면 어떻게 하나와 같은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정명이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시골 청년’을 본 정명이가 할머니와 소통하는 법을 깨우친 것이다. 할머니를 웃게 하려고 할머니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할머니에게 뽀뽀를 해주며 스킨십을 해드리기도 하고, 밥을 안 드시겠다고 하면 정명이가 할머니에게 밥을 먹여드린다. 그러면 손자는 예뻐하니까 금방 안 드시겠다던 말을 잊고 식사를 다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시골청년 유투브를 보고 돌봄을 학습한다.
부모를 케어하는 과정은 어렵지만, 이렇게 어려서부터 학습을 한다면 돌봄을 놀이처럼 할 수 있고,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은주]
요양보호사, 작가, 일본문학번역가
에세이스트, 일본문학번역가, 요양보호사. 아픈 남동생의 아이들과 아픈 엄마를 돌보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정신없이 살아오는 동안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 후 할머니를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동안 돌봄과 나눔에 대해서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이 문학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 『오래 울었으니까 힘들 거야』, 『동경인연』을 출간했으며,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위해 직접 재가 요양보호를 담당한 이야기를 『돌봄의 온도』(헤르츠나인, 2023)가 있다. 인지증으로 고생하는 엄마를 재가 요양보호를 통해 돌보며 번역, 집필 활동과 각종 방송 출연, 강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좋은책만들기), 『친구가 모두 나보다 잘나 보이는 날엔』(작가정신), 『나는 드럭스토어에 탐닉한다』(갤리온),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지 않은 것들』(열린책들), 『배를 타라』(북폴리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고릴라에게서 배웠다』(마르코폴로) 등이 있다.
* 이미지 출처 : 시골청년 유튜브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