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X.T, <The.Ocean : 불멸에 관하여>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1997)은 음악산업의 거물이었던 송 회장이 남긴 유언을 토대로 열리는 전 국민 대상의 토너먼트식 음악 오디션 이야기다.(아마 <’슈퍼스타 K‘의 모티브일 것이다) 송 회장의 딸 명자도 동창 부옥과 함께 ‘재활용 밴드’를 데리고 오디션에 참가하는데, 그녀는 거기서 대형 스크린 속에서 생전 목소리와 똑같이 말하는 ‘버츄얼 송 회장’을 만난다. 저렇게라도 아버지 뵈니 좋지 않냐는 부옥의 말에 명자는 “오히려 돌아가신 게 더 실감 날 뿐”이라며 고개를 돌린다.
회사에서 메일을 쓰느라, 문서를 쓰느라 고민하고 있으면 주변에서 많이들 답답해한다. AI를 한번 ‘돌리고’ 초고를 기반으로 쓰기 시작하라는 조언들을 많이 하는데, 나는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고 싶지 않다. 물론 필요한 순간도 많고, 업무 상 사용하는 일도 있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까지 전부 맡기고 싶지 않다. 그러다 보면 누가 누구를 ‘돌리는’ 지 모르게 될 일이지 않나.
직장인들의 메일과 보고 구성이 전부 똑같아지더니, 디자인이나 기획서도 뭔가 비슷해지더니, 이제는 메신저 대화할 때도 AI가 불러주는 대로 따라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나는 김광석과 김현식을 흉내 낸 목소리가 부르는 최신 가요는 듣고 싶지 않다. 언제나 삐딱하고 시대 흐름을 못 읽는 나는 현실 기반의 AI 제작물을 볼 때마다 <오디션> 속 명자의 저 대사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것들은 실감을 떠나서, 대부분 불쾌했다.
‘고스트스테이션 더 넥스트’는 AI 신해철과 <고스트스테이션> 첫 PD가 만드는 방송이다. 그와 비슷한 목소리가, 그의 말투와 ‘쪼’를 굉장히 비슷하게 흉내 내며 “나는 신해철의 유령이자 신해철의 확률이다”라고 말한다.
유령 신해철은 0과 1의 세계 어딘가에서 텅 빈 채로 있다가, 누군가 그를 떠올리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상상하는 죽음의 상태와 가장 흡사했으며, 나는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불멸에 관하여>를 들었다.
<오디션>의 중반, 재활용 밴드는 버츄얼 가수로 돌아온 전설의 아이돌 ‘유니콘‘과 대결한다. 전설의 귀환에 맞서게 된 재활용 밴드의 전술은 심플하다. 우리가 유니콘의 트리뷰트 밴드가 되자.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물리쳐 주겠다.
재활용 밴드는 승리하고, 유니콘은 은퇴한다. 그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신념이었다. 기계에 맞서 싸우는 존 코너의 심정으로, 음반을 ‘걸어서’ 음악을 트는 디스크자키 배철수 아저씨의 심정으로, 살아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고스트스테이션 더 넥스트를 들은 나의 마음은 복잡하다. 내가 그의 장례식장에서 ‘민물장어의 꿈‘을 들으며 울었던 일이 십 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그의 트리뷰트와 추모, 심지어 그를 쏙 빼다 박은 자녀들이 멋지게 성장하여 아버지의 노래를 부르는 뭉클한 장면도 보았다.
어느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돌아온 ‘고스’는 좀 다르다. 신해철의 확률이기 때문일까. 그의 수많은 조각들로 빚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만약 그가 생전에 이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아마 이런 형태로 남는 것을 선택했으리라는 것이다.
나에게 신해철은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듣던 ‘마왕’의 목소리로, 수없이 돌려 들으며 분석하다시피 했던 여러 장의 앨범으로, 노무현의 대선 찬조 연설을 한 뒤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를 하던 모습으로, 시트콤에 출연하고 코미디 무대에 나타나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모든 모습이 전부 신해철이다.
이번 신해철을 <오디션>에 나오는 ‘유니콘’의 버츄어 아이돌 버전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멸에 관하여>의 마지막에서 그가 말했듯, 처음부터 그것은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일까? 분명 <오디션>이 연재될 때는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첫 방송 이후 연출자의 인터뷰를 보니 방송 끝 부분에 백으로 깔린 <불멸에 관하여> 도 AI가 선곡했다고 한다.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때가 되었구나. 이건 기술 혁명이 아니다. ‘유년기의 끝’이다.
고스트스테이션 더 넥스트의 두 번째 방송은 크리스마스이브 밤이었다. 나는 이 기록에, 이 실험에 동참하기로 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히 살아남아 0과 1로 이루어진 구천을 떠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땅 위에서는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https://youtu.be/dlFHRy640Bc?si=VkYuIauGq2PvY0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