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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Feb 20. 2021

아버지와 나

N.EX.T,<HOME>(1992)

<Boyhood>(2014)



1.

어떤 연예인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전생에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할 수 있다고 말하던데,

나의 부모님은 삼십 년 넘는 결혼생활 동안 수없이 하셨다.


2.

우리 가족이 대전으로 이사 왔을 때, 아빠는 인천의 섬으로 발령 났다. 공항을 짓는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 와보는 도시의 낡은 아파트 1층으로 이사하던 날 엄마와 누나, 나 셋만 왔다. 본래 흰색이었을 아파트 외벽은 회색을 넘어 거무죽죽했고, 좁은 집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주방 싱크대는 기름때에 절어 있었고, 베란다 창살은 열 살 꼬마가 보기에도 허술했다. 엄마는 문자 그대로 성장통을 겪던 누나에게 큰 방을 내주고 나머지 방 하나는 내게 줬다.


뒤늦게 도착한 외삼촌이 싱크대를 걷어차며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 거냐고 화를 내던 기억이 생생하다. 누이가 연고도 없는 동네에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한다길래 먼 길을 왔더니, 집이 이렇게 낡아 빠졌으니 화를 낼 만도 했다.

나는 전에 살던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그리웠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입을 다물었다.


3.

아빠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집에 왔다.

우리는 늘 그랬듯 밖으로 나가 내가 좋아하는 돼지갈비를 뜯고, 가끔 노래방도 갔다. 외식하지 않는 날은 아빠와 바둑을 두고, 페리카나 치킨을 시켜먹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선 같은 반 친구네가 페리카나 치킨을 운영했는데, 이번 동네도 같은 반에 페리카나 치킨집 아들이 있었다. 나는 이 동네가 조금 좋아졌다.


양껏 갈비를 먹고 집에 돌아와 샤워한 뒤 좁은 거실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서 뒹굴며 토요명화 방송 전 TV광고를 보는 게 좋았다. 좋아했던 것은 맥주 광고와 캔커피 광고. 나중에 크면 저런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요미스테리를 보면 무서워서 거실에서 엄마와 함께 잤다. 다음날에는 거실에서 테마게임 재방송을 보거나 누나 방에서 만화책을 보며 놀았다. 아빠가 어디서 쉬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4.

언젠가 한번 가깝게 지내던 이웃집 지원이네 가족과 아빠 회사에 놀러 갔다.

우리는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에 갔다. 그곳은 아주 춥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라, 나는 토요명화에서 본 서부극 생각을 했다. 아빠는 대게며 회를 실컷 먹여주고 해수욕장에도 데려가 주었다. 나는 괜히 지원이 앞에서 어깨가 으쓱했다. 배 위에서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는 것도 재미있고 맛있는 것도 많아서 계속 여기서 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얘기를 했더니 아빠는 말없이 비웃었다.


아빠는 날씨 때문에 배가 뜨지 못하는 날을 제외하면 매주 토요일 집에 왔다. 덕분에 회사 여자 직원들이 뽑는 '이 남자 직원이 멋져요' 1위에 자주 선정됐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매주 집에 가는 아저씨는 아빠 한 명이었다고 했다. 해산물과 해수욕이 좋았던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던 모양이다.


5.

90년대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월미도로, 다시 수동 기어 운전으로 대전까지 오는 길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얼마 전에 어떻게 주 6일 근무하면서 매주 그 먼 길을 왕복했냐고 물었더니, 역시 말없이 비웃으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6.

공항이 완성되고, 고속도로 하나를 더 지은 뒤 아빠는 대전에 회사를 차렸다. 매일 일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전국을 넘어 외국의 골프장까지 바삐 다녔다. 그리고 빠르게 늙어갔다. 나는 더 이상 아빠 앞에 드러누워 교태를 부리지 않았다.


우리는 신도심의 아파트로 이사했고, 아빠는 드라마에 자주 나오던 국산 세단을 몰았다. 우리가 좋아했던 이창호 기사는 여전히 세계 최강이었지만 아빠와 나는 더 이상 바둑을 두지 않았다. 나는 늘 내 방에 틀어박혀 음악을 듣거나 소설을 읽었다. 모두 각자의 방이 생겼지만, 아빠가 어디에서 쉬었는지는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사춘기의 나는 지친 아빠를 보며 아빠를 닮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7.

군 입대하던 날, 훈련소 근처에서 회를 사주며 아빠는 소주를 한 잔 하자고 했다. 강제 징집의 슬픔에 잠겨 극도로 예민했던 나는 잔을 거부했다.

입소하던 순간, 선글라스를 낀 아빠가 내 갈색 파마머리를 만지며 이렇게 하고 군대 들어가는 놈이 어디 있냐며 가서 죽도록 맞을 거라고 했다.


나는 1979년도에 입대했던 아빠를 비웃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소했고, 실무병들에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쌍욕을 먹으며 첫 순번으로 머리를 하얗게 밀렸다. 그리고 훈련 기간 내내 마시지 않았던 소주의 단맛이 혀 끝에 아른거려 몇 번인가 몰래 울었다.


8.

어릴 적 그렇게 광고를 많이 봤는데도, 나는 결국 광고 회사에 자리잡지 못했다. 마시는 제품만 학습한 탓일지도 모른다. 인턴이며 수습이며 특별 채용이며 말만 다르고 다 똑같은 짓을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하다가, 결국 백수가 됐다.


수염이 덥수룩한 아들이 밥벌이도 제대로 못 하고 라면만 먹던 시간에도, 아빠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일에는 내일 뭐하지, 고민하고 주말에는 창고나 이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날들을 보내다 광고와 관련 없는 회사에 지원했다.


최종 면접까지 통과하는 과정까지 아빠는 고생했다는 말만 하고 별 말이 없었다. 나는 어릴 적 함께 바둑을 두며 아빠가 지금 여기에 두면 중앙으로 나아갈 수 있지, 하고 가르쳐주던 것처럼 내 길을 알려주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입사 전 신체검사만 남아있던 날, 아빠가 서울에 올라와 함께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내가 스무 살을 보낸 동네에 있는 대학병원이었다. 간단한 검사를 몇 개 하는데 긴장했는지 혈압이 높게 나왔다. 나보다 더 긴장했던 아빠는 마치 간호사에게 봉투라도 찔러줄 기세였고, 한 번 더 재면 되니 가만히 계시라고 간호사가 쏘아붙였다. 나는 말없이 비웃었고, 다시 잰 혈압은 정상이었다.


나는 밥을 사겠다며 아빠를 스무 살 시절 자주 가던 해장국집에 데려갔다. 아빠는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일터로 바삐 돌아갔다.


9.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더이상 신도심이 아닌)아파트와 구형 세단을 모두 처분한 부모님은 귀향을 결정했다. 그나마 두 분이 동향이라 다행이다. 안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늙어가고 있는 나는 곧 돌아갈 곳을 잃게 된다. 인디언에게는 고향이 두 개 있다는데 나는 한 개도 없다. 2세의 슬픔이 이런 걸까.


10.

고등학교 졸업 후 첫 해외여행,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에 갔다. 전철이 대교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던 높은 빌딩들에 놀라, 첫 상경한 시골 영감처럼 창문에 코를 박고 구경했다. 게이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오래도록 둘러본 거대한 공항의 모습에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었던 첫 해외 여행지의 모습보다 그날 본 인천공항의 모습이 더 오래 남았다. 그 황무지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


그리고 몇 년 후, 긴 여행을 마치고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아버지의 기분을 상상한다. 아버지와 나에 대해서 생각한다.


https://youtu.be/cgx_U7GCx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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