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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Jan 06. 2021

회상

산울림, <새야 날아>(1982)


오래 전 어느 날,

이별은 무등록 대부업자처럼

내 고시원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원금에 이자까지 내놓으라며 협박을 놓았다.


나는 방구석에 바짝 엎드려 이것마저 내놓으면

내 사랑은 정말 마이너스라며 눈물로 호소했으나,

결국 좋았던 기억도 싫었던 기억도 모두 빼앗기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겨울날의 길거리로 내쫓겼다.

신용 회복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빼앗긴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스마트폰도 클라우드도 없던 시절이라 직접 움직여야 했다.


나는 매일 밤 라디오를 듣고, 여기서 뭔가 했었던 것 같은데 싶은 장소를 바삐 돌아다녔다.

비오는 압구정을, 눈 내리는 홍대 앞을,

사랑을 맹세했던 제3한강교를 방문한 뒤에야 가까스로 몇몇 기억을 복원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서랍 속에 넣었다.


기억을 복원했으니 이제 이별한 사람이면 응당 그렇듯이 한동안 술에 빠져 살 차례였다.

이따금 친구를 불러내 하소연도 하고, 한마디로 얘기하면 보기좋게 차인 것 같다며 쌍욕도 해댔다.


쓸데없이 한강에 가서,

눈물처럼 반짝이는 한남대교 불빛을 보며

담배를 물고 개츠비 흉내를 냈다.


조금 지난 뒤,

내가 서랍 속에 넣어두고 가끔 소중하게 들춰보는 기억이 그에게는 가끔 우편함에 꽂혀 신경 쓰이게 하는 달갑잖은 고지서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참 지난 뒤,

몇 번인가 이별을 경험하고 나서 사랑도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지만,

이별도 다른 이별로 잊혀진다는 것을 알았다.

매번 다른 이별의 장면들 덕분에,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던 그 대부업자 이별이 내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던 장면이 떠오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랜 날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오지도 않은 이별이 온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연기를 하며 내 발로 스스로 방문을 열고 걸어나온 것이었다.


내 방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은 이별이 아니라,

김창완 아저씨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8DaU8LgbM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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