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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Jan 05. 2021

태양계

성시경, <처음>(2011)

모직 코트와 목도리를 꺼내놓은 며칠 전부터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고민했는데, 퇴근길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문득 그 사람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1월이 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 년 내내 생일만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곧 한 살 더 먹는데도 좋아? 했더니 내년에도 생일은 어김없이 돌아올 테니 괜찮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그 웃음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우리의 연애는 딱히 특별하지 않았다. 사실 매일이 비슷했다. 합정동에서 커피 마시고 홍대 앞에서 라멘 먹고 왕십리에서 영화 보고 교대 앞에서 곱창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 침대로 들어가는 일처럼 규칙적으로 돌아갔다.

그 사람의 일상에 내가 들어가고, 내 일상에 그 사람이 들어오는 일이 내선순환 열차처럼 자연스러웠다. 부지런히 돌아가는 초록별 지구 덕분에, 또 서울교통공사 덕분에 우리는 가만히 손을 잡고 앉아 매년 돌아오는 11월을 기다렸다.


  어느 날, 외계인의 침공인지 운석이 떨어졌는지 지구가 돌아가는 걸 멈추고 11월이 사라졌다. 나는 공중전화부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11월을 찾아 나섰다.

수많은 별마다 그 사람의 흔적이 남겨져 있어, 나는 그곳마다 착륙했다. 대부분 좋아하던 국수 가게, 즐겨 쓰던 향수,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 같은 거였다. 어떤 별에서는 술을 마시다 우연히 마주친 발라드 가수를 다짜고짜 끌어안기도 했다.


  혼자 국수를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다음 별로 이동했다. 하루종일 FM 음악방송이 흐르는 별도, 나무에 치즈가 열리고 강에 레드와인이 흐르는 별도 있었다. 운석을 만나기도 했고 돌연변이 우주 해충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11월은 없었다.


연료가 떨어져가면서 많은 것을 잊어갔다.


그 사람이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 휴대폰 번호, 언제나 나지막하던 그 목소리를 차례로 잊어버리고 나서야 지구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지구가 다시 돌기 시작하면서 거쳐왔던 수많은 별이 아스라이 멀어졌다. 휙휙 지나가서 작은 점처럼 보였다.


빙글빙글 도는 지하철 2호선에 앉아 멀어진 별들에 대해 생각한다. 지구가 다시 돌게 된 후, 나는 버림받은 인공위성처럼 넘실넘실 흘러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지구가 몇 바퀴를 돌아도 멀어진 별들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멀어졌다. 밤하늘을 올려봐도 가끔 비행기만 지나갈 뿐,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달이 눈썹만 해졌던 날, 나는 겁이 나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도 옷을 갈아입을 공중전화부스가 보이지 않았다. 흑흑 울며 한참을 헤매다 집에 들어온 바로 다음 날 문구점에서 야광 별을 사서 천장에 붙였다.


야광 별 아래에서 잠들게 된 뒤로 공중전화부스를 찾아 헤매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혹은 스마트폰을 쥐고 부지런히 돌아가는 초록별 지구 위에 혼자 서 있다. 달은 제멋대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이제 밤 하늘에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지런히 11월이 돌아오고, 지하철이 교대역에 정차하고, 하얀 코트를 입은 긴 생머리의 여자가 날이 추워져서 기쁘다는 듯 과장스럽게 몸을 움츠리며 지하철에 올라타기라도 한다면 끝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마는 것이다.


https://youtu.be/lCOiahfnN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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