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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Jan 18. 2021

복통

형제공업사, <복통>(2015)

<도쿄 타워>(2007)



복통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의 두 개.


1. 복부에 일어나는 통증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몹시 원통하고 답답하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


내 식대로 해석하면 1번은 언제 어디서나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는 통증이고, 2번은 사촌이 땅을 사면 생기는 통증이다. 편의상 1복, 2복으로 부르기로 한다.


나는 오랫동안 첫 번째 복통에 시달려온 1복인. 언제 어디서나 1복의 기습에 대비하는 습관이 배어버린 인간이다. 영화 <타짜> 에서 아귀는 "상상력이 풍부하면 거 인생이 고달프다"는 대사를 했는데, 변기가 없는 곳에 가면 꼭 배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웬만한 서울 주요 거점의 개방 화장실 위치를 꿰고 있으니 상상력이 풍부한 서울 시민은 미리 나를 찾아오는 것이 좋다.


먼저 1복 이야기를 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의 어느 날, 급식을 먹고 나니 1복이 찾아왔다. 그 학교엔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는 사람을 졸업 때까지 똥쟁이 타이틀을 붙여 놀려먹는 아주 똥 같은 규칙이 있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그간의 사고사례로 인간은 1복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을 설득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는 아주 똥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없애야 한다. 그러니까, 이걸 놀리는 놈은 아주 덜떨어진 놈이다.

친구들은 동의했고, 나는 화장실에 다녀왔고, 그 후로 친구들은 내 뒤에서 나를 똥쟁이라고 불렀다.


고등학생 때는 화장실 하이패스 학생이었다. 하도 수업 시간에 화장실 가도 되냐며 선생님의 말을 끊어먹는 통에 너는 말 하지 말고 다녀와도 된다는 경멸섞인 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1복인은 그런 경멸 따위에 상처받을 시간이 없다. 또 그렇게 교실을 나가서 정말로 화장실만 다녀왔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 여러모로 괜찮았다.


1복의 절정은 2007년의 중국 여행. 중국 음식은 아주 맛있고 기름졌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 여행을 함께했던 누나가 지금도 나를 경멸하고 있다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내가 1복인이 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된 이유에는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는 아기 시절 장이 꼬인 적이 있다는 것.

80년대 후반, 젊은 부부가 장이 꼬인 아기를 데리고 동네 병원을 찾고, 병원에서는 이 아기는 죽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아내는 넋이 나가 다리가 풀리고, 남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전화를 돌리고, 다행히 대학 병원에서 아기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아기는 그 후유증으로 그만 1복인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도곡동을 지날 때마다 그 병원을 노려보며 소리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안암동 병원에 갔어야 했다고!


이토록 추잡하게 길었던 1복의 고통은 뜬금없이 군대 전역 후 수그러들었다. 바닷물이 천연 비데 역할을 해주던 군함 생활을 해서일까, 1복보다 무서웠던 선임들 때문이었을까, 나는 궁금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일은 나도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디서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2복이 나를 찾아왔다.


2복은 내 뱃 속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가,

내가 타지의 고시원 옥상에서 엄마 생각을 하며 싸구려 맥주를 마실 때,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의 소식을 들을 때, 멋진 애인이 생긴 학과 동기를 만날 때마다 팔을 길게 뻗어 더러운 손톱으로 나를 찔러댔다. 아주 음험하고 은밀해서, 나는 오랫동안 그것이 2복인지도 몰랐다.


정말로 사촌이 서울에 아파트를 사고 나니 2복은 웅크린 몸을 펴고 내 뱃속에 벽돌집을 짓기 시작했다. 허구헌날 뚝딱대는 통에 줄창 목구멍으로 신물이 넘어왔다. 2복의 벽돌집을 부수고 싶어 나는 최대한 매운 음식과 독한 쏘주, 담배 연기까지 넣어 보았지만, 2복은 끄떡없고 오히려 1복이 다시 돌아왔다.

늑대를 한 마리 구해야 하나, 나는 절망했다.


한여름에도 두꺼운 정장을 입고, 지하철로 서울 전역을 누비며 수없이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에는 매일같이 1복과 2복이 함께 날뛰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경험으로 습득한 개방 화장실 위치 덕분에 1복을 달랠 수 있었고, 결국 스스로 밥벌이를 하게 된 뒤로 2복의 벽돌집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리고 두 번째 민방위 훈련을 받을 즈음, 나는 야근과 야식과 회식으로 배불뚝이가 되었고, 다시 간헐적 1복인이 됐다. 2복의 벽돌집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그간의 사고사례로 나는 2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잠 못 드는 밤에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는 1복을 앓던 어린 시절의 밤이 떠오른다. 똥쟁이에다 겁쟁이였던 나는 컴컴한 화장실 불을 켜고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늘 반쯤 열려있는 안방 문 앞에 서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엄마를 말 없이 쳐다보며 이 복통과 공포에서 엄마가 날 구해주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러면 언제나 엄마는 곧 깨어나 내 배를 한참 문질러주다가 화장실에 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가 나올 때까지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짜증 한 번 부리는 일이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늘 신기했다. 엄마는 왜 아무 소리도 안 냈는데 매번 일어나지?


그리고 내가 어릴 적 2복을 앓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내가 어려서가 아니라 엄마가 허구헌날 자다 깨서 내 배를 문질러주고, 등을 어루만져줬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됐다.


서른이 넘었는데 나는 아직도 가끔 복통의 밤을 보낸다. 어릴 적에는 1복을 앓았고, 이제는 2복을 앓는다.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고 있던 엄마가 일어나서 내 배를 문질러주고 돌아간다.

매번 그렇다.



https://youtu.be/COiIC3A0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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