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아니 한겨울밤의 꿈

by 꽃반지


나는 이제 겨울의 오리온자리를 어떻게 잊을까!

35도를 웃도는 날씨, 둔탁하게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아침에 널어두면 바삭하게 마르는 빨래.

갑자기 찾아온 여름인 듯하지만,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어깨에 닿을 듯 커다랗게 빛나던 겨울밤의 별들. “그러니까 지금이 겨울인 거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계절을 의심하는 나를 조용히 수긍케하던 오리온자리. 태국에 도착한 첫날밤 거닐었던 거리, 몇이서 스쿠터를 타고 산속의 어둠을 하염없이 가르던 도로 위, 방콕으로 향하는 이층버스 안에서도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오리온자리가 가만히 겨울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었다.

-2월 17일의 일기




올해 2월. 생일을 겸해 태국 북부의 작은 마을에 머물렀다. 어떤 인연과 우연을 덧대어 각자의 좌표가 꼭 한데서 겹쳐졌을까. 마을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일본과 타이완과 홍콩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자그마한 스쿠터에 몸을 싣고 태국의 맨 끝으로 함께 떠났다. 천여 개의 커브를 돌고 돌아야 다다를 수 있다는 그 곳. 가는 길에 사계절을 한꺼번에 만났다. 봄의 연보라가 활짝 피어있다가도 금세 풍경이 뒤바뀌어 마른 낙엽이 뒹굴고, 다시 어린 여름의 초록이 눈앞에 펼쳐진다. 작은 스쿨버스에 몸을 실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고, 문득 코끼리를 마주쳐 서로의 눈부처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얼마를 갔을까. 해가 똑 떨어지자마자 산 속의 어둠은 다급하게 내린다. 어둠을 마주한 서로의 얼굴에도 다급함이 서린다. 어떡하지? 서로 절대로 떨어지지 말자. 밤이 짙어질수록 공기는 차가워져 길 위엔 얼음이 엉기고, 매서운 어둠 속을 서로의 붉은 꼬리등에 의지해 조심스레 나아간다. 지독한 검정을 가르는 건 오직 빨간 불빛 세 개. 반짝이는 서로의 좌표. 나 여기 있어. 너는 어디 있니. 서로가 서로를 기댄다.

문득 머리를 들어 바라본 하늘에는 분명하게 반짝이는 오리온자리. 굽이치는 산길 위에서 내 머리 위의 별들도 함께 굽이친다. 오리온의 허리춤에 나란한 별 세 개가 마치 우리와 꼭 같아서 빙긋 웃었다. 이웃한 저 별 셋도 실은 서로 아주아주 많이 떨어져 있댔다. 1초에 지구 일곱 바퀴 반을 돈다는 빛의 속도로도 600년을 꼬박 달려야한다. 별들이 누군가에 의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오리온자리’ 로 한데 묶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지 않을까. 어쩌면 일생에 단 한번 마주할 일 없는 얼굴들이 생의 잠깐 동안 한데 모여 하나의 방향으로 함께 흘렀구나. 마침내 컴컴한 어둠 속을 무사히 뚫고 나와 서로를 바라보며 뜨거운 국수를 마주하던 순간을 어떻게 잊을까. 잠든 친구의 언 볼 위에 내 손을 살며시 대어보던 그 날 밤.


“지현! 나 문득 여행의 진짜 의미를 알겠어.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소중한 순간을 나누고 서로를 오래 기억하는 것. 이게 진짜 여행이라는 걸 갑자기 깨달았어. 너희와 함께한 그 날이 내 인생에서 제일 반짝이고 아름다운 순간이야.”


한국으로 돌아와 여행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던 어느 밤, 함께 여행했던 친구 중 하나가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 지금은 다른 곳을 여행하고 있지만 그 날만큼 아름답고 벅차진 않다고, 우리들이 많이 보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목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 들으면서 우리들의 어깨 위로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던 그 밤의 별들을 떠올렸다. 너무 아름답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감정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섭게 끌어안았다. 꼭 다시 만나서 함께 별을 보러 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그러자고 거듭거듭 약속을 했지만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삶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아름다운 기억은 쉬이 휘발되며, 지키고 싶은 약속일수록 지키지 못하게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멀리서라도 서로의 반짝임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좌표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꽤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밤하늘의 한구석을 밝히는 별들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한구석을 살그머니 밝히는 중일 게다. 누군가는 나의 불빛을 보고 내게 기대고, 나 역시 누군가의 불빛에 나를 기댄다. 혼자가 아니구나. 이 무섭도록 드넓고 깜깜한 세상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하는구나. 서로가 서로를 기대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별처럼 반짝인다.


나와 내 삶에 등장하는 누군가들 사이에는 얼마큼의 시간과 공간과 우연과 인연이 깃들어 있는 걸까.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상관을 가늠해보진 않지만 이따금 밤하늘을 들여다본다. 우리들이 만나는 일. 시간과 공간과 우연과 인연의 귀퉁이가 맞닿는 아름답고도 놀라운 일. 그래서 우주가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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