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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뭐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고

오관게

by 꽃반지


이까짓 버섯이 얼마나 대단한건데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눈 앞의 음식에 얼른 젓가락을 가져가고 싶지만, 꾹 참고 두 손을 포개고는 스님이 외는 오관게를 따라 읊는다. 오관게는 불교에서 식사 전에 외우는 게송으로, 천주교로 치면 '식사 전 기도'와 같은 셈이다. 오관게를 입으로 중얼중얼 따라 하지만 마음은 얼른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오관게에 집중하지 못했던 이유는 비단 배고픔만이 아니었다. 마음에 콕 걸리는 구절이 있었다. '...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바로 여기. 아니, 눈 앞에 놓인 음식이 무슨 산해진미도 아니고, 기껏해야 두부, 버섯, 야채로 만든 것인데 내가 이 정도도 못 먹나?라는 반항심이 들었다. 내가 뭐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고 두부, 버섯, 야채를 받기가 부끄러울 정돈가. 잘 나가는 부자들은 한 끼에 천만 원씩 척척 쓴다는데. 그 사람들이 나보다 나쁜 짓은 훨씬 더 많이 저지르고 다닐 텐데. 마음에 반항심이 올라오자, 오관게를 하기가 참 괴로웠다. 그래서 스님의 게송을 따라 읊는 척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그 구절은 조용히 얼버무렸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흐으으음..."


나는 천주교 신자다. 신자였다,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3대가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에, 나도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고 엄마 손에 이끌려 성당을 다녔고, 가기 싫을 때는 엄마 손에 등짝을 맞아가며 다녔다. 미사 시간에는 여러 가지 기도를 외면서 앉았다 일어났다 무릎을 꿇었다 하는데, 여러 기도 중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기도가 하나 있었다.


"...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이 대목에서 모두가 오른손 주먹을 쥐고 명치께를 세 번 친다. 잘못을 참회하는 행위다. 어릴 때는 별생각 없이 어른들을 따라 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기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본인이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잘못한 일이 있다면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기도는 '내 탓'이라는 틀을 미리 만들어 놓은 데다, 심지어 보통 잘못도 아니고 '큰 탓'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 기도를 할 때, 나는 주먹 쥐고 가슴께를 쾅쾅 때리는 대신 손을 슬그머니 내려버렸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관찰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가슴께를 쾅쾅 때리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주먹을 쥐고 가슴을 때리며 참회하는 사람들 속에 나는 홀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다들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사는 거지?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체인이 굵은 금줄을 목에 하고 다니는, 신부님이라기보다는 경호실장 아니 헬스장 트레이너가 더 잘 어울리는 보좌신부님과 친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신부님께 이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바로 벼락같은 한마디가 돌아왔다.

"야 인마! 종교는 배스킨 라빈스가 아니야. 네가 맘에 드는 것만 골라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짜식아."


때맞춰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고해성사도 싫었다. 탈곡기 털듯 지난 과거의 행적을 샅샅이 털어 신부님께 고해바치고 신께 용서를 구하는 시간. 부모님 속을 썩였습니다, 친구를 미워했습니다, 류의 간단한 잘못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고해할 수 없는 형태로 바뀌어갔다. 언젠가는 칸막이 너머의 신부님께 "신이 정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신부님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신은 나를 용서했을까. 신과 대화하고 싶다면 신과 나, 이렇게 둘이서 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성당에 가지 않게 됐다.


오관게는 성당에 발을 끊은 이유인 나의 오랜 반항심을 일깨웠다. 여기서도 내 탓이라고 하네? 내가 이 음식 먹기에도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하네? 그냥 좀 당당하게 먹으면 안 되나. 이 정도 음식은 먹어도 충분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주면 안 되나? 그리 큰 욕심 내는 것도 아닌데. 답답했다.




한 송이버섯 앞에 고개를 숙이기까지


성당이야 안 가면 그만이지만 사찰요리에 푹 빠져 있는 만큼, 나는 오관게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오관게를 할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부분을 고요히 나만의 흐으으음으로 성실히 대체했다. 그렇지만 오관게를 거듭할수록, 그리고 스님들의 말씀을 들을수록, 내 안의 반항심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더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흐으으음이 사라져 버렸다.


한 숟갈 들고는 "스님, 맛있어요!"하고 엄지를 치켜들면 "음식에는 맛있다와 맛없다가 없습니다."하고 오관게를 들어 가만히 일러준 스님도 있었다. "음식은 맛있는 게 최고 아닌가요?" 하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되묻는 내게, 음식은 '몸을 지탱하는 약'이지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며, '양념'이라는 말도 재료의 성질을 보완하는 '약념'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렇다고 사찰음식이 맛을 무시하고 건강만을 위하는 음식은 아니다. 사찰음식은 정말 맛있다. 그렇지만 음식을 단순히 감각의 즐거움을 위한 '맛'으로 대하는지, 몸을 위하는 '약'으로 대하는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본다.


요즘은 감각의 시대다. 음식은 감각을 충족시킨다. 단순히 시각과 맛을 넘어 이제는 씹는 소리를 극대화 해 청각까지 자극하는 ASMR이 대세가 된 지 오래다. 가녀린 소녀가 라면 30개를 한 번에 끓여먹고, 뿌링클 치즈볼 100개를 쌓아놓고 허겁지겁 먹는다. 사람들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며, 씹는 소리가 좋다며 열광한다. 한번 그런 영상을 보게 되면 나도 정신없이 빠져들어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린다. 그렇지만 한꺼번에 휘몰아치듯 먹는 음식이, 알록달록한 색과 쫄깃한 소리를 가진 음식이 정말 내 몸에 '약이 될지'는 먹는 사람이 제일 잘 알 것이다.


가끔 손이 바쁜 조교님을 도와 요리 재료를 준비할 때가 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조리실, 분량의 재료를 테이블마다 놓는다. 개수를 맞춰 재료를 예쁘게 접시에 담아내고 있자면 미처 눈여겨본 적 없던 버섯갓의 예쁜 주름을, 고추의 찬란한 색깔을, 호박의 싱싱한 풋내를 비로소 마주한다. 이들이 하나의 씨앗으로 이 세상에 와서 나와 마주하기까지의 역사를 생각하면, 땅과 해와 바람과 농부의 손길을 떠올리면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처음에 나는 비건이 아니었지만, 사찰요리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비건으로 전향하게 됐다. '음식'으로 여겼던 내 눈앞에 놓인 고기 한 접시의 그 너머를 생각하면 '울부짖는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관게에 대한 반항심을 극복하고 나자, 좋은 차를 마시듯 나머지 구절도 차차 음미하게 되었다. 마지막 구절인 '도업을 이루고자...' 이 부분도 처음엔 '스님들이야 도 닦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굳이 나에게 해당 사항이 있겠나'는 알량한 마음이었는데, 며칠 전 내가 좋아하는 정효 스님이 '도업'을 '행복'으로 바꿔 오관게를 읊어주셨다. "행복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먹습니다."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치듯 행복이 가볍게 일었다.


음식이란 뭘까?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다. 사람은 왜 먹고 마실까? 살아가기 위해서. 그렇다면 사람은 왜 살아갈까? 살아가는 데는 이유가 없다. 태어났으니까 산다. 그렇다면 이왕 태어난 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행복하게 살아야지. 어떻게 행복하게 살까. 행복하게 먹고 마시면 되지. 행복하게 먹고 마시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내 몸에 득이 되는 음식을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것. 오관게에 담긴 사찰요리의 정신이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겸손해지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약으로 삼아

행복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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