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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외아들의 고기 한 점

by 꽃반지
수박 속으로 담근 여름김치



"그럼 버리면 되지."

방금까지 내가 먹던 음식이 1초 만에 쓰레기가 되는 그 순간, 나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살아가며 수없이 목격한 타인의 행위 중에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한 장면.


어렸을 때 엄마는 늘 양을 고려하지 않고 밥을 그득 담아 주었다. 밥 한 숟갈만 남겨도 아주 호되게 매를 맞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양의 밥을 다 먹어치우느라 걸핏하면 체하면서도, 한 번도 감히 밥을 남기거나 버리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서야 내가 남들보다 위가 작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내가 너무 답답하고, 엄마가 밉고, 왜 밥이 많다는 소리 한 번을 못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어릴 때 받은 엄한 교육 때문에 음식을 남기거나 버리는 것을 주저하게 됐다. 그런데 커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들은 너무나 음식을 쉽게 남기고 버렸다. 먹던 음식을 망설임 없이 휙 하고 쓰레기통에 버렸고, "배불러서 못 먹겠어." 하고 밥 먹던 숟가락을 탁 놓았다. 눈앞의 음식에 대한 일말의 고민 없이 당당하게 남기고 버리는 행위를 보며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데?


언젠가 들은 한 스님의 말씀이 잊히질 않는다.

"한 부부가 외아들을 데리고 사막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결국 외아들을 잡아먹었습니다. 그 부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외아들의 고기를 대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세요. 돈으로 샀다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샀다고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이 참 이상하지 않은가? 현대사회에서는 당연히 돈으로 사면 내 것이다. 내 돈 주고 물건을 샀는데 어떤 사람이 그 물건을 가리켜 "그거 니 돈 주고 샀다고 니 꺼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은 돈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생을 바쳐 돈을 벌고, 더 많은 돈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코웃음을 친다.


처음에 내가 사찰요리를 시작할 때는 2,30대 또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 혼자 산다>나 <요즘애들>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이 사찰요리를 먹는 것이 방영되자, TV를 보고 사찰요리를 배우겠다며 찾아오는 젊은 친구들이 늘었다. 한 번은 내 또래의 아가씨 두 명과 같은 조에서 요리를 했다. 완성된 요리를 먹을 만큼 각자 접시에 덜어먹자는 내 의견과는 달리, 그녀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완성된 요리를 한 번에 접시에 담았다. 조금 먹은 뒤에는 남은 음식을 싸갈 통이 없다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놀라고 언짢은 마음이 오래갔다. 아무래도 우리 세대가 어른들보다는 음식이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으니 음식을 쉽게 남기고 버리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화가 났다. 그들은 그냥 그들이 배운 대로 할 뿐인데.


마트에 가서 내가 번 돈으로 버섯을 산다. 그럼 이 버섯은 나의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 버섯을 내가 누구에게 주든, 발로 쾅쾅 밟든, 쓰레기통에 버리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내 것이 아니라고 하면 뭔가가 꼬이기 시작한다. 조금 많이 나갔다 싶지만, 임신을 이유로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를 안락사시킨 직장동료가 있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임신 때문에 고양이 죽였어요." 그녀는 생명 때문에 생명을 죽였다. '돈으로 산'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타인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생명조차도.


묻고 싶다. 과연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



너머를 생각하는 마음


요리를 할 때 스님들이 직접적으로 "음식 버리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재료 하나를 가지고 먹는 방법을 요모조모 알려주신다. 평소에 버리는 부분들도 스님의 손 끝에서 알뜰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놀라고 흐뭇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얼마 전엔 늘 수박의 '손잡이'라고 여겼던 하얀 속껍질로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웠다. 궁상맞게 뭘 그런 걸 까지 먹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내 눈 앞의 재료가 한 톨의 작은 씨앗에서 출발해 어엿하게 빛을 내기까지 그동안의 노고를 헤아릴 수 있다면, 저절로 남김없이 알뜰하게 먹는 방법을 궁리하게 된달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 한 알 / 장석주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돈으로 당연히 권리를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입함과 동시에, '비하인드 스토리'를 슬그머니 교묘하게 지워버렸다. 어린아이들이 하루에 열몇 시간씩 착취를 당하며 만든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 오로지 고기를 위해 잔인한 환경에서 소비되는 소와 돼지, 가격 경쟁을 위해 각종 음식에 널리 사용되는 유전자 변형 콩과 옥수수. 뒤에 감춘 이야기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현대 사회는 말끔한 포장과 현란한 광고를 앞에 세우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걸 봐! 아름다운 것만 봐! 추악한 이야기는 너에게 필요 없는 걸!" 우리는 눈과 귀를 간질이는 화려한 이미지에 빠져들 뿐.



당신은 그 너머가 궁금합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려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항상 처한 현실의 그 너머를 궁금해했다. 그게 주인공의 운명이다. 다른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는데 유독 나만 저 너머가 궁금하고, 그러다 보니 금기를 깨고 때로 어려움에 처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판도라는 열어서는 안 될 금단의 상자를 열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가져다주며, <라이온 킹>의 심바도 다들 가지 말라는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기어코 발을 디딘다.


지난 글에서도 인용한 창간 4주년 기념호 <Axt>에 실린 문장을 잠깐 빌려보자.

때로 문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서사'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서사', 즉 영화, 드라마, 심지어 유튜브의 개인방송, 브이로그, 예능 등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서사-이야기'인가? (중략) 단지 더 이상 긴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성'자체가 더 이상 이 시대에 유효하지 않은 게 아닐까?


사람들은 눈 앞의 정보를 처리하기에도 급급하다. 더 이상 비하인드 스토리 따위를 궁금해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 현실에서 내 몫의 자리 하나 지키기도 빡빡하기 때문에, 감히 그 너머를 궁금해할 여력이 없다. 영화는 온통 때리고 부수고, 드라마는 시청자가 뒷이야기를 궁금해할 새도 없이 미친 전개와 속도로 치닫고, 유튜브는 씹고 쩝쩝거리는 이미지와 소리를 제공한다.


나도 늘 나에게 묻는다. 나는 너머가 궁금한 사람인가. 너머를 감당할 용기가 있는가. 벌떡 잠자리에서 일어나 물 한잔 못 먹고 뛰어나가 꽉 찬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사무실에 가방을 올려놓기 무섭게 키보드를 켜고 업무용 메신저와 메일을 확인하고, 하루 종일 몇 차례나 반복되는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을 하고, 겨우겨우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등을 땅에 붙이고 드러눕기 바쁜 하루. 이 와중에 너머를 궁금해한다고.


그래도 너머가 궁금한 사람이 되려 애를 쓴다. 경계에 무던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한다. 오늘 유독 표정이 안 좋은 친구에게 무슨 일 있냐고 말 한마디 건네고, 다른 이가 쓴 책을 읽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화관에 들리고, 마트에서 구입하기보다는 직거래를 통해 농부님께 농산물을 구입하고, 간판에 불을 환하게 밝힌 치킨이 유독 당겨서 모른 척하고 한 입 먹고 싶지만 대안은 없는지 한번 더 생각한다. 나의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어제저녁, 작은 영화관에서 위안부를 다룬 다큐멘터리 <주전장>을 보았다. 일본 내 총책임자라는 그가 눈동자를 반들거리며 한 말. "난징 대학살은 없었습니다... (중략) 위안부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거죠? 그런 쓸데없는 일에? 역시 포르노에 대한 관심과 같은 걸까요? 흐흐." 아울러 그는 자기가 쓴 책 이외에는 읽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저 인간이 바로 너머가 궁금하지 않은 세계의 끝판왕 아닐까.


부단히 궁금해하고 움직여야겠다. 내 눈 앞의 작은 버섯의 너머에서부터. 우리는 모두 우리 삶의 주인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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