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국

by 꽃반지



누군가에게 꽃을 건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또 누군가가 건넨 꽃을 받아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꽃의 예쁜 얼굴만큼이나 꽃으로 둘러싸인 순간은 각별하다. 꽃을 둘러싼 인생의 한 장면에 자그마한 무늬를 아로새기는 느낌이랄까. 말랑하고 따뜻한 어느 여백에 꾹 하고 떡살을 박아 넣는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아홉이었을 때다. 어머니와 나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어느 즈음을 막 지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생일선물로 수국을 갖고 싶다고 문득 말했다. 어머니의 생일은 음력으로 한여름에 있었다. 해마다 바뀌는 어머니의 생일이 어려웠지만, 나도 세상에 난지 이제 아홉 해가 지났으므로 누군가의 생일은 으레 축하해주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아홉 되기 한 해전, 어머니에게 생일선물로 처음 건넨 것은 장바구니였다. 몇 해나 끌고 다녀 낡고 해진 장바구니를 어머니가 새것으로 사고 싶다고 했었다. 네모진 바닥에 네 개의 바퀴가 달려있는 까만 철제로 된 장바구니. 어머니는 늘 장바구니에 참 많은 무게들을 담아 다녔다. 장바구니 안에는 네 식구가 먹을 것, 입을 것들이 담겼다. 4인분의 삶이라 해도 족할 것이다. 새로 산 장바구니는 갓 난 병아리처럼 어머니 뒤를 졸졸졸 잘도 따라다녔다. 4인분 삶의 무게에 병아리도 곧 생기를 잃었다.


수국을 갖고 싶어.


불 꺼진 방, 어둠의 허리춤을 한참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내는 것처럼 그 날의 기억은 너무 낡고 바래버렸으므로 애써 더듬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한 마디에 어린 마음에도 장바구니와 수국 사이의 아뜩한 간극을 퍼뜩 꿰뚫었다. 한 해를 빙그르르 돌아 다시 어머니의 생일을 마주하고야, 생일선물로 장바구니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일선물은 생일 선물다워야 하겠구나, 받아든 사람에게 기쁨이어야 하겠구나. 뒤늦게 조금 슬펐다.

아마 어머니와 나는 집근처 시장으로 자박자박 걸어가 꽃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수국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겠지. 어머니는 나에게 분명 누가 가장 예쁘냐 묻고, 나의 의견을 따라주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사기전에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제법 무거웠을 수국 화분을 어떻게 집으로 데리고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푸른 수국을 끌어안던 어머니의 얼굴과 그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내 몸 어딘가 작게 일렁였던 파도의 느낌은 아직 또렷하다. 누군가에게 이 아름다운 꽃을 선물한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겠지. 아홉 살, 생애 처음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했다. 어머니와 나와 수국이 자박자박 집을 향해 함께 걸었다. 내 안에선 줄곧 파도가 일렁였고, 나는 그만 마음이 뻐근해졌다.

현아, 여기 와서 이 꽃 좀 봐라.


어머니는 매일같이 수국의 안부를 궁금해 했다. 꽃을 들여다보는 당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좋았다. 어머니를 따라 매일 수국을 들여다보았다. 자라나는 계절의 키를 따라 짙어가던 수국의 반듯한 푸른색이 예뻤다. 곧 가을이 다가와 촘촘하게 빛나던 푸른색은 시들어버렸지만, 어머니는 다음해에도 수국을 들여야겠다고 기꺼이 말했다.

그 뒤 해마다 여름이면 작은 마당에 수국이 활짝 웃었다. 어머니는 수국 외에도 아름다운 꽃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천리향, 사랑초, 목단, 장미… 물감 번지는 마냥 작은 마당에 꽃들이 번져갔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꽃들을 들여다보았고, 나는 그런 당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좋았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갔다. 올해도 수국이 활짝 피었다. 커다란 꽃송이가 넘실거려 온 마당이 환했다. 꽃들이 어찌나 크고 탐스러운지 깜짝 놀라 꽃잎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어머니가 “얘야, 이 꽃들 좀 봐라.”하며 꽃송이를 내 얼굴에 살금 갖다 대었다.

어머니의 생일이 들어있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이맘때면 장바구니와 수국의 간극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어머니는 늘 끌었다. 끌고 갔다. 당신의 뒷모습이 때론 슬펐다. 끌고 가다 문득 멈춰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수국의 얼굴을, 당신의 삶을.

가지치기를 끝낸 마당에 큼지막한 꽃송이 몇이 떨어져있었다.

하나를 주워 빈 병에 꽂았다.

수국이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워서 고맙다.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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