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찾아온 할머니의 봄
나에게도 글씨가 찾아와서
이제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됐는데
봄이 왔는데요
당신이 가네요
- 이병률, <내 옆에 있는 사람> 중
무심히 책장을 넘기다 마음을 움푹 베였다. 한글을 배운지 1년이 막 지난 한 할머니가 썼다는 이 짧은 시를 몇 번이나 읽어 내리며, 글씨마다 담겨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더듬었다. 서투르고 설운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쓴다. 이제야 겨우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데 당신이 간다니, 당신이 없다니. 전하지 못한 마음들이 가만히 글씨 안에 고여 찰박인다.
그 마음을 더 만나고 싶었다. 두 팔로 꾹 그러안고 싶었다. 어찌 보면 내 작고도 큰 욕심이다. 글씨를 배우는 마음들이 하나같이 정답고 알뜰하기를 바라는 것. 매주 수영을 하고, 야채를 챙겨먹는 것과는 좀 다른 마음이기를 바라는 것. 아껴 배우고 아껴 썼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
며칠 뒤 아침, 노인 복지관에서 열리는 한글교실을 찾아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작은 교실을 빼곡 채운 어르신들이 나를 둥그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글씨를 배우는 어르신들 모습이 너무 예뻐서 같이 공부 하러 왔어요.” 둥그런 눈동자들에 대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 알뜰한 눈빛들이 이 곳에 참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눈빛들이라면 글씨를 아껴 배우고, 아껴 쓰겠구나, 다행한 마음이 들었다.
이응, 이응
기역, 기역
니은, 니은
디귿, 디귿 …
선생님의 목소리를 쫓는 수십 개의 목소리에 작은 교실이 옹옹거리나 싶더니, 금세 단단하고 다정한 말들의 물결이 공간을 철썩인다. 글자를 배우고야 말겠다는 촘촘한 마음들이 빚어내는 어떤 질감 같기도 했다. 물결 속에 앉아 있다가 그만 푹 잠겼다. 내 마음에 물이 통통 차오른다.
“‘나는 안다’라고 써보세요.” 읽기에 이은 받아쓰기 시간. 작은 공간이 또 한 번 들썩이더니 저마다의 연필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골똘히 무언가를 써넣는 모습, 옆 친구를 흘끔거리는 모습, 아예 ‘나는 모르는디?’ 라는 큰 소리로 주변을 까르르 흔드는 모습. 아이 마냥 풋풋한 그 모습들이 예뻐 웃음이 쿡 나다가도, 쪼글쪼글한 주름이 뿜어내는 어린 글씨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딘가 애잔한 마음이 인다. 놓쳐버린 때를 뒤늦게 붙드는 손길, 서투른 글씨가 부끄러워 서두르는 서투르고 서투른 마음들.
“나는 안다, 드디어 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종이 위에 또박또박 박히고, 마음이 어린 학생들은 온통 애가 달아 어쩔 줄 모른다.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가 되어 한 문장을 금세 꿀꺽 삼키고는 선생님의 입만 보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한 문장만 더, 한 문장만 더. 간간이 터져 나오는 “아, 재밌어!” 라는 말이 달큼한 샘물을 삼킨 양 시원스럽다. 아 재밌어, 아 맛있어.
“아가씨, 나 이거 좀 알려주면 안 될까?”
수업이 끝나 가방을 챙겨 나서려는데 앞줄에 앉은 할머니가 수줍게 공책을 건넨다. 쉬는 시간에 삶은 감자를 꺼내 나눠주기도 하던 귀여운 할머니다.
“내가 벌써 글씨 배운지 칠년, 팔년이 다 됐는데 아직도 글씨를 잘 몰라… 받침이 너무 너무 어려워.”
할머니는 수업을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못 들으니 아직도 이렇게 모른다며 줄곧 부끄러워했다. 수줍은 할머니처럼 공책에 살그머니 ‘안자인는’ 글씨를 ‘앉아있는’으로 바로 잡았다.
“우와, 할머니 공부 진짜 열심히 하시네요!” 얇은 공책을 꽉 채운 성실한 글자들이 할머니를 말해준다.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당신은 느려서 아주 천천히 배운다고, 돌아서면 자꾸만 잊어버려서 너무나 속상하단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름자라도 쓸 줄 안다는 그 표정에 행복이 묻어났다. 작은 칭찬에 으쓱한 할머니는 저것도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수 있다며 벽에 붙은 작은 종이를 가리켰다. ‘교실에서 나갈 때 불끄기’ 라고 쓰여 있었다.
글씨를 배우니 뭐가 제일 좋으냐는 나의 물음에 할머니는 ‘자신 있게’ 라는 말을 거듭 했다. 예전에는 어딜 나가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남들 앞에 떳떳하다고. 글은 몰라도 말씀을 이렇게 잘하지 않느냐는 나의 의아한 얼굴에 대고, 할머니는 글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괜히 주눅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남들에게 들킬까봐, 한 마디를 해도 실수할까 늘 마음이 따끔했단다. 아 그렇겠구나. 세상이 건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생각은, 세상의 많은 부분을 나만 모른다는 생각은 한 사람을 충분히 외롭고 옹색하게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아주 글만 알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어. 모든 걸 하고 싶어. 버스타고 어디라도 가보고 싶고, 영어도 하고 싶고 컴퓨터도 하고 싶어. 나는 진짜 글씨만 알면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 정말로…” 할머니는 작은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할머니의 어깨를 도닥였다.
나는 안다. 드디어 안다.
할머니 울음 뒤로 칠판에 적힌 말끔한 글씨가 포개진다. 여기 드디어 알아서 기쁘고, 또 아픈 할머니 한 명을 마주하고 글씨에 대해 생각한다. 글씨가 찾아온 할머니의 봄을 생각한다. 글씨는 어쩌면 봄의 씨앗이겠구나, 글씨가 있으면 한 사람의 마음에 기어코 봄이 오고 말겠지. 글씨를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면 떠나는 당신을 꼭 붙들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