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
수능을 마치고 이루고 싶었던 나의 몇 가지 로망 중 하나는 드럼을 치는 거였다(보라색 염색도 있었으나 아직까지 망설이는 중이다). 이렇다 할 계기도 없이 그저 끌렸기에 그땐 내 영혼이 드럼을 찾는다고 생각했지만(걸핏하면 영혼 타령을 하던 시기였다. 내 영혼이 수학을 거부해, 내 영혼이 떡볶이를 원해, 내 영혼이...)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지층처럼 내 안에 오랜 시간 차곡차곡 축적된 입시 스트레스로 인해 뭐든 다 때려 부수고 싶었던 분노의 점잖은 표출 아니었을지. 그 무렵 곧 다니게 될 대학교 근처의 파스타 가게에서 알바를 시작했기에 알바를 마치면 학교 일대를 돌며 드럼을 배울만한 학원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후문 근처에서 간판 하나를 발견했는데, 조심스레 지하로 내려가 문을 여니 굽실굽실한 노란 머리가 허리께까지 오고 얼굴은 붉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낀 선생님이 도끼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앉아있었다. 여기가 맞나? 벽에 걸린 기타며 베이스가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님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도끼빗 선생님이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나를 봤다. 이 도끼빗이 네 도끼빗이냐? 와 같은 물음을 내심 기대했는데, 뭐 배우려고? 드럼 배우러 왔는데요, 지극히 정상적인 물음과 답이 오갔다. 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드럼을 배울 순 없었지만.
베이스
학원에 연습용 드럼 패드가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그 앞에는 이미 숏커트를 한 여자아이가 앉아 양손에 스틱을 쥐고는 패드를 신나게 두드리고 있었다(두들겨 패는 건 내 몫이어야 했거늘). 거참. 난감한 표정을 짓고 선 내게 선생님이 대뜸 기타를 치라고 했다. 드럼에 열망이 컸다면 고요히 인사를 하고 다른 학원을 찾아갔을 텐데, 꼭 그런 것도 아니라 그렇게 뭐든 두드려 부수고 싶어 하던 십 대는 선생님이 내주는 기타를 품에 안았다. 땡땡한 나일론 줄을 보드라운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순간 느껴지는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쉽사리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연습실 한구석에 앉아 기타를 껴안고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내게 어느 날 도끼빗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넌 베이스 해라. 베이스요? 야, 여자가 베이스 치면 얼마나 멋있는데. 그럼 그럴까요? 드럼에서 기타로 가볍게 노선을 변경한 것처럼, 기타에서 다시 베이스로 이동했다. 모름지기 자기 악기가 있어야 한다는 도끼빗 선생님의 말에 처음 얼마간은 벽에 걸린 악기를 빌려 쓰다가 베이스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알바로 번 첫 월급을 다 털었다. 사장님은 처음 번 돈이니 부모님 내복이라도 한벌씩 사드리라고 조언해주셨지만, 철딱서니가 없었던 나는 되려 엄마에게 돈을 더 받아 일렉트릭 팬더 베이스를 중고로 구입했다. 바디가 하얀 도자기처럼 반들반들 윤이 나는 멋진 녀석이었다. 그리고... 너무너무 무거웠다. 어깨가 쏙 빠질 정도로. 그렇지만 오로지 폼을 잡기 위해 선택한 악기였기 때문에, 한동안은 학교에 늘 베이스를 메고 다녔다. 동기들이 한 번씩 저도 메보자며 등에 업었다가 금세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생애 첫 악기를 구입했지만 기타보다 줄도 두껍고 손도 아프고 여전히 연주에 흥미를 가질 수 없었던 나는 일 년가량을 간신히 다니다가 이듬해 유학을 떠났고, 내 베이스는 아는 사람을 통해 팔아버렸다.
우쿨렐레
유학을 다녀오고 몇 년이 지나 우쿨렐레라는 하와이 악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기타를 작게 줄여놓은 크기로 마치 장난감같이 앙증맞은 데다, 줄도 단 네 개라 기타보다 심리적 부담이 훨씬 덜했다. 악기를 향한 나의 열망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리니 하드 케이스에 담긴 우쿨렐레가 집으로 배송되어 있었다. 운지법도 기타에 비해 훨씬 간단하고, 코드 단 몇 개만 외우면 한 곡을 금세 연주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코드를 짚으며 연주를 할 수 있게 된 곡은 <요다는 녹색 얼굴>이었는데, 방에서 우쿨렐레를 안고 이 노래를 주야장천 불렀다. 그리고 차츰차츰 범위를 넓혀나갔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도 우쿨렐레를 챙겼다. 방 한구석에 악기가 있고,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기만 하면 작은 방이 음악으로 채워지니 혼자 우쿨렐레를 안고 노래를 많이 불렀다. 외롭고 고단한 타지 생활에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게다가 서울은 도심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이 있어 나를 즐겁게 했는데, 여러 공원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또한 주제가 다양했다. 우쿨렐레를 주제로 한 '우크페페'라는 페스티벌은 우쿨렐레만큼이나 앙증맞고 귀여운 성격이었다. 다들 우쿨렐레 하나씩을 안고 잔디밭이나 계단에 앉아 함께 우쿨렐레를 치던 순간은 오래도록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타
우쿨렐레를 좋아했지만, 언젠가는 줄 여섯 개 달린 기타를 치고 싶었다. 기타 소리를 가만히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손가락 끝이 붓고 갈라지는 고통 따위는 다 잊고 다시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에 번번이 휩싸였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기타를 몇 번이나 시작했다 그만뒀다. 홍대에 살 때는 기타 동아리를 잠시 기웃거리기도 하고(모여서 기타 치는 시간보다 술 먹는 시간이 두 배 가까이 되는 것 같아 그만둬버렸다), 마포도서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했으며(그때의 내 기타는 콜트 미니였는데 선생님이 손에 비해 기타가 작다고 해서 상처 받아 관뒀다), 사직동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구경 갔다가 거기서 연주한 기타 선생님에게 홀딱 반해서 꽤나 비싼 일대일 레슨을 반년 가량 받기도 했고(선생님이 돌연 제주로 떠났다), 건대로 이사 와서는 일 년가량 기타 교습소를 다니며 기타를 배웠다. 선생님의 밀착 레슨으로 간신히 줄을 더듬거리고는 있었으나 실력이 좀처럼 붙질 않았고(일주일 내내 연습 한번 안 하는데 실력이 붙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만)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일 년째 내 교재는 미취학 아동용이었다. "그래, 난 원래 첼로를 배우고 싶었잖아!" 귓가에 바흐의 무반주 협주곡 1번이 플레이되었다. 어쩌면 나와 기타는 애당초 맞지 않는 인연일 수 있겠다고, 내 귓바퀴에 앉아있는 누군가(아마도 바흐)가 귓가에 속삭였다. 깊고 그윽하고 우아하기까지 한 첼로가 나와 제격이 아니겠는가! 신나게 첼로 교습소를 찾아보는 한편, 얼마 안 가 기타를 관뒀다.
가끔 하루 중에 공백이 생길 때면 방 한 구석에 놓인 기타를 들고 줄을 퉁긴다. 이사를 하며 진즉에 고향집으로 보내버린 우쿨렐레를 다시 가져올까 싶은 생각도 들고, 꽤나 비싼 레슨비에 군침만 삼켰던 첼로를 이번에야 말로 배워볼까 싶은 생각도 들어 첼로 교습소 몇 곳에서 상담을 받기도 했다. 빨리 진도를 빼겠다는 욕심에 미리 사놓은 미취학 아동을 위한 기타 교재 3,4권은 언젠가 펼쳐질 날을 기다리며 책장에 얌전히 꽂혀있다. 다시 기타를 배워볼까 싶기도 하지만 아직은 가끔 기타를 품고 안고 쓰다듬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안 맞는 것은 분명히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엔 가닿지 못하는 곳이 있다. 기타(를 포함한 줄 달린 악기)는 내게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못 참고 번번이 뛰쳐나오는 세계다. 핸드폰을 뒤져보니 마지막 기타 레슨을 받은 지 오늘을 기준으로 벌써 1년 반이 되어간다. 줄 달린 것들을 품에 안고 퉁기는 실력은 여전히 미취학 아동이지만 로망의 속성 하나는 확실히 배웠다. 어떤 로망이든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하려면 어마어마한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이 삶의 곳곳에 빈틈없이 배어버려 그걸 사랑으로 느끼지 못할 만큼 되려 덤덤한 일상이 되어버려야 한다는 것. 엄마가 삼시세끼 차려주는 밥을 사랑이라고 결코 느끼지 못하는 유년처럼 말이다. 기타는 로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나는 그곳을 흘금흘금 곁눈질하면서 나의 로망을 쫓는다. 언젠가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세계에 닿겠다는 희망을 품고, 어떤 로망은 쫓고 어떤 로망은 잃어버리면서 오늘도 어디론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