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7일
무려 40분이나 일찍 역에 도착했다. 잠을 별로 못 잤는데도 그리 졸리지가 않아서 책을 보는둥 마는둥 하다가 대구에 도착. 1월에 다녀오고 처음 오는 것이니, 두달 반 만에 온다. 날이 흐리다. 동대구역 앞에 번듯하게 자리잡은 신세계 백화점 - 너무 빨리 지어서 날림 공사라는 말이 있더라 - 만 제외하면, 대구는 그래도 참 언제나 그대로인 도시이다. 내가 아홉살 때 짓다 말았던 그 커다란 오피스텔 건물도 아직 그대로이고, 대학 다닐 때 생겼던 비싸고 못한다는 치과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종종 가던 시장도 녹슨 간판을 달고 늠름하게 서 있고, 주말이면 종종 시켜먹던 반점도 이른 아침부터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보물을 떠나 가장 멀리 떠났다가 자기의 집에 묻혀있었던 보물을 발견한 어느 사내의 이야기다. 어릴 때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의 감상평 한마디는 '븅신'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야기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득 채워야 비울 수 있고, 가장 멀리 떠나야 비로소 진실로 돌아올 수 있음을. 답답하고 지겨워 죽을 것 같던, 거실에 걸린 먼지 뽀얀 액자처럼 영원히 거기에 머물 것만 같아서 너무 무섭고 두렵던 일상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고 나서야 그 아름다움에,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빈 고향집. 딸내미 온다고 엄마가 솥 그득 해놓고 간 떡볶이. 떡볶이를 먹으면서 200개나 되는 TV채널을 하나하나 돌린다. 이토록 많은 채널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몇 번이나 심술궂게 틱틱 돌리다가 '미녀와 야수' 애니메이션에 눈길이 멈춘다. 아주 꼬맹이 때 너무 좋아하던 만화. 마침 미녀가 야수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혼자 남겨진 야수가 절망에 겨워 하는 장면이다. 야수를 떠나고 나서야 그를 좋아하는 자기의 마음을 비로소 깨닫고 돌아온 미녀. 그 사랑에 멋지게 보답하는 야수의 숨겨진 미모. 마법이 풀려 야수가 다시 왕자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우와씨, 미남!' 이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 고전은 역시 고전인지라. (세월이 이만큼이나 지났는데 어찌 저 미모가 아직까지 먹힌단 말인가.) 시간이 이만큼 흘렀어도 우리는 여전히 저런 뜨거운 사랑을 그리워하고 꿈꾼다. 겉모습이 아닌, 속에 품은 보물을 봐줄 사람. 나도 몰랐던 나의 보물을 꺼내 나를 아름답게 구원해 줄 사람.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오는 길. 내가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자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 이런 소소한 것들이 참 좋더라. 왜 그때는 몰랐을까. 배려가 배려인 줄을.
나도 그랬다. 고마운 마음이 고마운 마음인 줄 몰랐고, 사랑이 사랑인 줄 몰랐다. 내가 나고 자란 집이 예쁜 줄 몰랐고, 철마다 피는 꽃이 어떤 마음인 줄 헤아리지 못했다.
눈 앞의 보물을 까맣게 모르고 먼 길을 떠난 사내처럼, 나도 눈 앞의 보물을 까맣게 모르고 먼 길을 걸었다. 길 위에서 넘어지고 까지고 울면서, 내게 내민 손들을 잡는 법과 손을 내미는 법을 배우면서, 걷고 걸어 다시 돌아왔을 때 눈 앞의 보물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