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케
영화 <어느 가족>에서 고로케는 (내 기억이 맞다면) 두 번 등장한다. 도입 부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성공적으로 동네 마트를 털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갓 사 먹은 따뜻한 고로케,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 저녁을 함께하며 컵라면에 곁들이는 고로케이다.
아들 : (컵라면 국물에 고로케를 푹 담그며) 이렇게 먹으면 맛있어.
아빠 : 오, 맛있는데? 누가 알려준 거니? 아... 내가 알려준 거구나.
아버지와 아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눠먹은 고로케의 온기는 피로 맺어지지 않아 서걱대는 둘의 관계를 알맞게 데운다. "...나 다시 아저씨로 돌아갈게" 마지막이 될 저녁을 함께하며,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그때, 그들이 나눠먹은 고로케는 둘을 둘러싸고 있는 허전한 온도에 잠시나마 따순 숨을 불어넣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딱 두 번 등장하는 고로케의 위용에 무릎을 꿇고 고로케를 간절히 먹고 싶어 진다. 나라고 별 수 있겠나. 고로케를 좋아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눈에 띄는 고로케 집으로 달려가 몇 개를 허겁지겁 집었다. 급히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매장 내에 비치된 전자레인지를 사용했지만, 애석하게도 오래된 기름 맛 밖에 느낄 수 없었다. '맛있는 고로케가 있을 수 있나, 쩝'
내 인생에 등장하는 고로케는 늘 그랬다. 어릴 때는 엄마가 시장에 들렀다 종종 고로케를 사 오셨는데, 두 겹으로 댄 종이봉투에 기름이 배 투명해질 만큼 기름칠갑을 한 고로케였다. 눅눅하고 축축하고 배를 가르면 야채들이 숨죽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고로케. 참외를 늘 멀리하다가 어른이 되어 참된 참외를 처음 먹고 '아니, 참외가 이런 맛이었다니!'하고 통탄을 한 것처럼, 유년의 고로케를 전부로 오해하고 역시 고로케를 멀리해온 일생이다.
10월, 루프탑, 어쿠스틱. 제각기 낭만의 순도 100%를 자랑하는 단어들의 조합을 어찌 배기겠나. 어제저녁, 루프탑에서 즐기는 작은 콘서트를 다녀왔다. 음악은 아름다웠고 밤이 깊을수록 무르익었다. 추위도 함께 무르익었다는 게 문제지만. 패딩을 입고 오지 않은 걸 후회하는데 짝꿍이 물었다.
/저녁에 뭐 먹고 싶어?
/카레 우동!
온몸의 한기를 뜨끈하고 매콤하고 향긋한 카레로 물리쳐야지. 공연이 끝나고 집 근처에 일본인이 하는 아담한 가게로 갔다. 카레우동이라고 이 연사 큰 소리로 외쳤지만, 늘 그렇듯 결정적 순간에 카레 가츠동으로 메뉴를 바꿨고 짝꿍이 시킨 카레우동을 줄곧 부러워하며 내 밥그릇을 비웠다. 나는 정말로 늘 그렇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를 가득 채웠을 때, 그러면서도 옆 테이블에서 시킨 계란말이에서 눈을 못 떼고 있던 그때, 메뉴판을 뒤적이던 짝꿍이 문득 물었다.
/고로케 먹고 싶어?
/응!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틈만 나면 성공을 부르짖고, 너에겐 성공이 대체 뭐냐고 물어보면 늘 가장 앞에 '먹고 싶은 거 맘대로 먹고'를 세우는 짝꿍이 고로케를 주문했다. 옆 테이블 남자의 계란말이가 줄어드는 걸 하염없이 아쉽게 바라보고 있자니, 동글동글 웃고 있는 고로케 삼 형제가 등장했다.
접시에 줄을 맞춰 나란히 담긴 고로케의 자태와 젓가락으로 폭 찔렀을 때의 산뜻한 촉감이란.
/이게 별게 아닌데 왜 이렇게 행복한 거지!
왜 이렇게 행복한 거냐를 연신 중얼거리며, 따끈한 고로케를 한 젓가락 먹었다. 폭신폭신하고 가볍고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게 고로케구나. 곁들여먹는 작은 소스병이 따라 나왔지만, 영화에서 본 것처럼 남은 카레 국물에 고로케를 푹 찍어 먹었다. 아!
고로케는 행복을 가져다준다. 기름과 눈물로 범벅이 된 고로케가 아니라 제대로 된 고로케가 등장하는 순간, 우리는 확실하게 행복해진다. 아버지와 아들이 마트 털이에 성공했을 때도,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저녁을 함께 했을 때도 그들은 확실히 행복했겠구나, 어제 고로케를 먹으며 알았다.
그리고 어젯밤, 찰나 일지 몰라도 우린 고로케 덕분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