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물까지 챙겨주는 온라인 클래스' 이 카피가 친숙한 클래스101이 구독 비즈니스로 전향한 이후 준비물 판매 매출이 좀체 오르지 않아 곯머리를 앓는 요즘이다.
오랜만에 내가 일하는 플랫폼에서 준비물을 사며 사용자 빙의를 해볼까, 그러면서 새로운 취미나 시작해볼까 하는 요량으로 뜨개질 클래스의 올인원키트를 덜컥 사버렸다.
근데 이게 배송되는 데만 7일이 넘게 걸려 이럴 거면 누가 여기서 사나, 자조적인 마음을 애써 누르며 뜨개질의 기본 중 기본인 코 잡는 법을 배웠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 10년만에 하는 뜨개질이어서 겉뜨기, 안뜨기, 코바늘, 대바늘 뜨개 용어에 익숙해지고 다시 코를 잡고 실을 뜨는 데까지 뜸들이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처음 포장되어 왔던 타래실을 풀어 정리하고, 겉뜨기, 안뜨기 연습만 하는 데도 2시간이 지났는데 그 이후부턴 실을 감는 느낌이 손에 익어 토요일 해가 저물 때까지 실을 떴다.
뜨개질 한 두시간만 더 하고 일을 좀 해야지.
지난 주에 산 책 좀 읽어야지.
11월이 벌써 갔나.
한 해가 벌써 갔나.
손에 쥔 대바늘의 안쪽과 겉쪽으로 실을 감거나 돌리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누르며 '새로운 취미'에 몰두하는 듯했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쇼핑하듯 어떤 취미를 고르고, 그 취미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준비물(장비)을 지르고(?), 택배로 온 과슈물감을 팔레트에 쭉쭉 짜내는 건 확실히 키보드만 두들기는 나의 일상에 찾아오는 새로운 자극이다.
보통 이 설렘은 클래스 3,4강을 넘기기 쉽지 않다. 일단 내게 이 취미를 알려주는 크리에이터는 이미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 본업으로 나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라... 그녀의 능숙한 터치, 손놀림을 내가 따라갈 재간은 없다.
그렇게 한 강의를 넘길 때마다 점점 무너지는 나의 망작을 뒤로하고 새롭게 시작했었던 나의 여러 취미들: 플랜테리어, 과슈 페인팅, 소설 쓰기, 잡지 에디팅, 위빙, 비즈 공예 등의 활동은 어떠한 곳에도 이르지 못하고 그 때 샀던 준비물들과 A4용지에 열심히 필기했던 수업 자료들은 집구석 어딘가에 처박혀있다.
쇼핑몰 브라우징하듯 새로운 취미를 고르고, 장비에 과감하게 투자, 처음 몇일 몇주 몇달간 과몰입하는 나의 이런 패턴은 이제 익숙하다.
그 때 그렇게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는 나의 마음은 무언가 달뜬 상태로 현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짜낸 물감 다 쓰지도 못하고 굳어버리면 어떡하지? 이거 다 버려야되는데' 하며 무언가 불안한 마음으로 시작한 이 예감은 곧 현실이 된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는 나의 마음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마음이다.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낸 새로운 자극, 새로운 활동이 나의 현실을 바꿔줄 거라고. 나도 저 크리에이터처럼 그림, 공예에 소질을 발견하고 새로운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지갑을 연다.
정작 나라는 사람의 현실적인 그릇은 그 새로운 취미에 몰두하고 있을 때 제일 불안하다.
토요일에도 '이걸 뜰 시간에 일을 했더라면', '이걸 뜰 시간에 책을 읽었더라면' 이 생각을 접어두지도 못하는 나를 보면 결국 이 취미라는 건 나로 하여금 더욱 격하게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는 어떤 타임밤의 역할 정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일요일의 반나절까지 거진 주말을 다 쏟아부어 뜬 넥워머를 남자 친구에게 선물해주었다. 주말동안 나의 시간이 저 조그만 실뭉치를 짜는데 다 써버렸구나 씁쓸한 마음의 이면에 진심으로 선물을 좋아해주는 그를 보았다. 이번에 시작한 취미에선 어떤 보람을 느꼈다.
불안에서 보람으로 넘어오려면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그 취미를 인정해줘야하는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