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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시야간숙소 May 25. 2023

근대적 이분법의 ‘양날개’로의 전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고

이건 7년 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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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한다.” 칼 마르크스가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표현한 일종의 테제이다마르크스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토대)로 나누고 상부구조에 대한 하부구조의 우위를 주장했다그에게 하부구조는 경제를 의미했다이와 같은 이분법적 접근은 어디를 우위에 놓느냐에 따라 첨예한 논쟁을 낳게 되는데 조야하게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도식을 옹호하는 입장을 경제결정론으로 비판하는 것이나 그 반대를 관념론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역사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9세기 말 – 20세기 중반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달을 두고 첨예한 논쟁이 발생했는데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을 돈에 대한 탐심절약에 대한 태도합리적 정신 등으로 설명할 것이냐축적 체제의 변모와 경제 흐름 등으로 설명할 것이냐가 바로 그것이다전자는 좀바르트와 막스 베버로 대표되며 후자는 페르낭 브로델 등 경제사가들로 대표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어떤 식으로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했으며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 및 발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독특한 관점에서 설명한 책이다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이는 태생적으로 다분히 첨예한 논쟁을 낳을 수밖에 없는 관점이었으며 실제로 많은 논쟁이 지속되었다베버에 대한 비판은 게 중에는 합리적인 비판도 있을 것이고베버의 주장을 왜곡하고 극단화하여 무의미한 내용이 될 수밖에 없는 비판도 있을 것이다또한 한편으로는 번역본 중 길 출판사에서 나온 2010년판의 해제의 주관적 해석에서 주장하는 바와 달리 베버가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있을 것이다이에 본인은 베버의 주장과 베버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그 논쟁의 배경을 살펴보면서 근대적 이분법으로서 정신과 물질을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 게 좋을지그에 맞춰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달을 어떻게 볼 것인지 짧게 논평하고자 한다.

2. 베버의 주장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는 먼저 자본주의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한다. 야코프 푸거로 대표되는 근대 자본주의 성립 이전 초기 자본주의의 ‘돈에 대한 무제한적 이득 추구’와 달리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은 오히려 재산의 무절제한 축적과 사치성 소비를 조절하고 억제하며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 정의한다.
 이는 근대 이전 구체제 하 귀족들의 사치성 소비와 축적된 자본의 비생산적 투자, 즉 수익성 없는 토지를 구입하고 시골에 저택을 짓는 식과 확연히 다른 근대적 정신적 태도인 것이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설교 내용을 통해 구체화된 내용을 보여주었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자기 목적으로 전제된 자본 증식에 대한 관심을 개인의 의무로 여기는 사고방식 ② 윤리적으로 채색된 생활양식의 준칙 ③ 모든 적나라한 향락을 억제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쾌락주의가 아니라 순수한 자기 목적 ④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한 돈을 번다는 것은 근대적 경제질서 아래에서 직업상 유능함의 결과
사치는 근대 이전까지는 경제성장의 요소가 아니라 성장이 한계에 부딪친 사회 내에서 생산된 ‘잉여’를 부당하게 혹은 비경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정신을 세세하게 나누어 보면, 영리 추구의 정당화, 무절제한 소비의 억압, 축적된 부의 생산적 사용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팽창과 연결되며 베버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근대 자본주의를 팽창시킨 원동력은 자본주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화폐 재고의 원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관한 것이다.”(막스 베버, 2010, 92p) 베버가 이렇게까지 표현한 이유는, 자본주의를 체계로서의 자본주의와 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로 나눠본다고 했을 때 직업적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근대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적합한 형태를 발견했고, 자본주의적 기업은 그 태도에서 적합한 정신적 추진력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것이 상호작용하면서 근대 자본주의가 팽창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자본주의 정신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가?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영리 추구의 정당화, 무절제한 소비의 억압과 이에 대한 ‘윤리적 생활양식’의 기원으로 금욕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 구체적으로는 칼뱅주의적 금욕주의로 규정한다. 먼저 베버는 단순히 ‘종교개혁’에서 편협하게 기원을 찾는 데는 단호히 반대하나 “자본주의 정신의 질적 각인과 세계로의 양적 팽창에서 종교적 영향이 함께 작용했는지, 실제로 작용했다면 어느 정도로 그랬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적 토대에 근거하는 문화의 어떤 구체적인 측면들이 종교적 영향으로 소급되는지가 확인되어야 할 뿐”(막스 베버, 2010, 138p)이라고 말한다.

현대와 달리 그 이전의 사회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다. 교회는 인간의 모든 활동에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했고 이는 경제활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당시 교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팔아서는 안 되는 하느님이 주신 시간을 파는 것을 의미하고, 이자를 받는다는 건 일하지 않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금지했다. 결국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종교에서 찾는 이유는 “종교적 신앙과 종교적 삶의 실천이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방향을 제시하고 개인을 거기에 붙잡아두는 심리학적 동인”(막스 베버, 2010, 172p)이라 할 때, 금욕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고무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칼뱅주의는 예정설을 기반으로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세상에서 향하는 ‘사회적 노동’ 즉, 새로운 직업관념을 탄생시켰다. 이는 노동 자체가 절대적인 자기 목적(소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리상의 금욕주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니라 일상‘속’에서의 지향으로 연결되었다. 따라서 목적 자체로서의 재화 추구는 비난하나 근면, 절제에 입각한 경제적 성공은 신의 호의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앞서 설명한 자본주의 정신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영리 추구의 정당화는 사회적 노동의 결과로서 신의 호의와 연결되고, 무절제한 소비의 억압은 일상 속에서의 금욕주의로 연결되며 윤리적 생활양식은 구원을 지향하는 개인들에 대한 종교의 거대한 영향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금욕주의에 의한 소비의 억압을 금욕주의에 의한 영리 추구의 해방과 결합해서 본다면 그 외적인 결과는 금욕적 절약 강박에 의한 자본형성. 획득한 부의 소비적 사용이 제어되면서 그 부의 생산적 사용, 다시 말해 투자자본으로서의 사용이 촉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막스 베버, 2010, 353p) 이것이 베버가 분석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관계이며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 및 발전과 연결된다.


3. 베버의 주장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논쟁의 구도


위와 같은 베버의 주장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베버를 옹호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베버를 비판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베버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일일이 반비판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주장을 ‘오독’했다고 보거나 이미 그 비판에 대한 반비판이 자신의 주장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선 몇 가지 베버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고, 그 비판을 어떻게 볼 것인지 서술하도록 하겠다.

먼저, 베버가 반드시 프로테스탄티즘 국가는 자본주의 발달로 이어지고, 가톨릭 국가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티즘 국가와 가톨릭 국가를 나누어서 각각의 예외를 찾는 식의 비판은 비생산적인 비판이기 때문에 제외하겠다.


프로테스탄티즘 국가의 예외 국가로 스코틀랜드를, 가톨릭 국가의 예외 국가로 프랑스를 뽑는 식이 그러한 예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칼뱅주의가 곧 자본주의의 발달로 이어진다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이라 설명(베버가 진정으로 내세우고 입증하려는 태제는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적 기계적 ‘일대일’ 인과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의 다양한 구성요소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는 다시금 이 자본주의 정신의 다양한 인과 요소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막스 베버, 2010.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길, p.564.))했음에도 칼뱅주의만을 두고 비판하는 것 또한 비생산적인 비판이기 때문에 제외하겠다. 베버가 일일이 반비판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비생산적인 논쟁을 제쳐두고 근대적 이분법으로서 ‘정신’과 ‘물질’의 구도로서 유의미한 비판을 다루자면 다음과 같다.

베버의 주장을 도식화시켜보면, 금욕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 → 자본주의 정신 → 근대 자본주의 발달로 볼 수 있다. 이는 마르크스의 도식을 생각했을 때 하부구조에 대한 상부구조의 우위로서 기존 마르크스의 주장을 역전시킨 것이다. 대부분의 합리적 비판들은 이런 지점에서 도출되는데 스스로 표현한 ‘체계로서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부분을 베버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정신을 등장시킨 총체적 모체를 형성한 많은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만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종교적 요소가 아닌 경제적 요소로서 ‘자본주의 정신’의 또 다른 기원은 어디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 자본주의 발달 자체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전자(자본주의 정신의 또 다른 기원)의 경우 종교적 힘과 경제적 힘 사이의 관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종교가 인간의 사회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반면 동시에 경제적, 사회적 변화 또한 종교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버는 명확히 종교적 영향을 우위로 다루었다. 즉, 종교개혁이 끼친 ‘결과’를 보되 그 종교개혁을 이끈 ‘원인’은 보지 않은 것이다. 점증하는 교환과 상업, 국가주의의 발달에 있어서 중세적 종교질서는 그 장애물이라 할 수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부는 성장하는 국민국가의 이익과 일치할 수 없었고, 봉건적 토지 관행과 묶여 있는 교회의 종교관 또한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그 흐름 중 하나인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은 오히려 그러한 경제적 변화에 맞추어 ‘변형’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직업관념이 ‘탐욕과 야망의 억제’라는 것에서 ‘견제 받지 않는 상업적 정신에 적합한 것’으로 바뀐 것은 실제로 설명이 180도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현저한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명백히 그 변화를 칼뱅주의자의 직업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신이 칼뱅주의의 직업관을 점진적으로 수정하고 결국 완전히 변형시켰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노먼 F.캔토, 2000. 『서양근대사 1500-1815』, 혜안, p.210.)


후자(근대 자본주의 발달의 경제적 측면)의 경우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은 자본 형성’ 그 자체만으로는 불가하다는 주장이다근대 자본주의는 차라리 하나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으며 경제적 측면에서 주목한다는 것이 베버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화폐 재고의 원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자본의 생산적 투자와 비생산적 투자를 나누는 것은 합리적 정신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근대 이전의 문제는 부족한 것이 자본이 아니라 그 자본을 생산적으로 투자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그러한 기회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확립하는 가운데에서 마련되었다또한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의 효율성은 그 정신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치에 있는가’ 중요한 교역의 흐름이 모이는 곳에 있는가 아닌가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또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연결된다. 결국 베버는 ‘합리성’ 이외에 ‘자본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비판의 구도는 크게 보면 ‘체계로서의 자본주의’ 즉, 경제적 토대(하부구조)와 ‘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 즉, 상부구조 간에 어느 부분을 중심으로 볼 것이냐의 구도이다. 물론, 번역본 중 길 출판사에서 나온 2010년판의 ‘해제’의 ‘주관적 해석’에서 주장(자본주의는 체계 또는 형태로서의 자본주의와 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 즉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는 근대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를 발견했고, 근대 자본주의적 기업은 바로 그러한 태도에서 가장 적합한 정신적 추진력을 발견했다. 이는 ‘적합한’ 관계이나 ‘법칙적인’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막스 베버, 2010.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길, p.603.))하는 것처럼 베버는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를 간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명확히 ‘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우위에 두는 관점에서부터 모든 논리를 전개해나갔으며 선대제와 기계제 공장 체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근대 자본주의를 팽창시킨 원동력은 자본주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화폐 재고의 원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관한 것”이라 설명한 것 등은 어떤 변명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논쟁’을 낳을 수밖에 없는 구도를 스스로 전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결여’되어 있다.

4. 결론 :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다시 마르크스의 테제로 돌아와 보자.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인가? 둘 다 맞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앞서 베버의 주장에 대한 비판들의 ‘유의미성’ 외에 반대로 그러한 비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을 살펴봐야 한다.

‘의식’ 혹은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토대의 반영인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발달이 극에 달할수록 계급 적대는 ‘단순화’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왜 그렇지 않은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흔히 토대의 대표격인 ‘경제’와는 별개의 영역 또한 존재함을 시사해준다. 그것은 아날학파의 페브르 식의 ‘심성’이든, 헤겔식의 ‘시대정신’이든, 프로이트식의 ‘무의식’이든,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식의 ‘이데올로기’든 간에 사람들의 사고와 의식을 규정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를 ‘이데올로기’라고 통칭한다 했을 때, 이데올로기는 현실적 존재조건, 간단히 말해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현실성, 즉 물질성을 갖는다.

책의 해제에서 “서구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을 조건 지은 경제적 요소가 자본주의, 즉 경제체계로서의 자본주의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신과 자본주의 체계라는 두 범주는 각각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주관적, 객관적 차원으로서 서로 다른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해 형성, 발전했다. 그러므로 양자는 기계적이고 법칙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다.”(막스 베버, 2010, 613) 라는 말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라는 기존의 도식을 ‘해체’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상부가 본래 하부임을, 하부가 본래 하부임을 주장하며 어느 것의 우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해석하는 ‘양날개’와 현실에 물질성을 갖는 ‘양날개’로서 사고해야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관계를 바라본 베버의 관점은, 그 ‘공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의미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양자의 논쟁과 모순을 격렬히 작동시켰다는 데에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논쟁은 수두룩하다. 그 논쟁을 변증법적으로 결합하여 양 관점을 동등한 위치로서 다룰 ‘통합적인 역사 서술’을 기대한다.
 
 
※ 참고문헌
 
노먼 F.캔토(2000), 서양근대사 1500-1815, 혜안
막스 베버(2010),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길
배영수(2005),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페르낭 브로델(1996),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1, 까치
페르낭 브로델(1996),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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