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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은벼 Oct 30. 2024

ADHD 세상 재건 프로젝트
(feat. abroad)

대치동 영어의 위력, 아이 날아오르다 

“오우! 당신 아이의 영어 아주 훌륭해요. 미국에서 살다 온 줄 알았어요!”


약물로 꾹꾹 눌러왔던 충동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 것인지 어느 날 아이는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하급생을 참지 못하고 대응하고 말았다.

덕분에 남편과 나는 교장실로 소환되어 수제비 반죽 하듯 손을 바지 위에 연신 밀어대는 중이다.


풍채 좋은 미국인 교장은 우리를 보자마자 기선 제압 하듯 속사포처럼 영어 공격을 해댔고, 자꾸만 안드로메다로 가려는 정신을 붙잡고 있던 와중 아이 영어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날아와 꽂혔다.


아이는 자신의 상황과 억울함에 대해 교장에게 열성적으로 브리핑을 한 모양이었다. 어릴 때부터 본인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한 톨 남김없이 이야기하던 아이다 보니 교장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교장은 아이의 영어를 원 없이 들을 수 있었을 테지.

교장이 우리에게 일장연설을 하던 와중에 영어에 대한 떡밥을 던졌으니, 이는 필시 빈 말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외로 오기 전까지 나는 아이 영어교육에 꽤나 열정적인 엄마였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나는 넌지시 남편에게 마음속 고민을 툭 던져 보았다.


“우리 좀 순한 아이들이 많다는 곳으로 이사 가보는 게 어때? 지금 사는 곳도 괜찮기는 한데 강한 애들한테 아이가 종종 타깃이 되잖아.”


덩치는 크지만 눈치가 없던 아이는 소위 빠른 아이들의 먹잇감이 되고는 했다. 강한 자를 만나면 고개 숙이거나 피하는 것이 명백한 자연의 이치이건만 이렇다 할 깡다구나 대책도 없이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던 아이는 학기 초만 되면 먹이사슬 제일 하단에서 허우적거리곤 했다.

그런 아이를 끌어올리기를 수차례, 엄마인 나도 점점 지쳐가던 와중 풍문으로만 들었던 학군지가 궁금해졌다. 아이의 진단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학원과 집 공부를 병행하며 멱살잡이를 했던 터라 마냥 두렵지 만은 않았다.


행동파인 우리 부부는 이사 결심을 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대치동 주변부에 정착했다. 조용한 동네 분위기와 고즈넉한 학교 풍경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아이 교육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첫 번째 관문은 영어학원 레벨테스트 통과였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답게 대치동에는 수많은 학원이 있었고, 그중 내가 먼저 찾아야 할 학원은 초등영어학원이었다. 

당시 자녀들을 대치동 학원에 보내고 있던 친한 언니가 금쪽같은 정보를 주었고, 나는 그 속에서 아이가 갈 수 있을만한 학원을 추릴 수 있었다. 

4점대 학원, 3점대 학원 등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신조어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고, 인터넷과 주변 지인들이 제비처럼 물어다 준 정보를 바탕으로 나름의 분석을 마쳤다. 팩트 체크를 주관적으로 했기에 모두 맞다고도 할 수 없지만, 또 모두 틀렸다고도 할 수 없겠다.




1.     대치동 초등영어학원은 보통 7세들이 10월과 11월에 레벨테스트를 실시하며, 4가지 영역을 모두 충족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4가지 영역이라 함은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이며 학원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 영역이라도 과락일 경우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
 레벨테스트 비용은 만원에서 3만 원 사이로 형성되어 있고, 아이 현황 파악을 위해 지방에서도 올라와 레벨테스트를 보는 경우도 많기에 이 시기 학원들은 돈을 쓸어 담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7세 고시라 부른다.

 3점대 학원은 1학년이 미국 3학년 수준의 영어를, 4점대 학원은 4학년 수준의 영어를 배우는 곳으로 과거에는 3점대 학원이 많았으나 점차 4점대 학원 선호도가 높아지며 유명학원들은 대부분 4점대 학원으로 출발한다.


2.     소위 말하는 Top 3 학원은 영어유치원 3년 차 아이들도 우후죽순 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그 학원을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프렙학원과 별도 과외도 존재한다. 레벨테스트 대비 과외 비용은 보통 시간당 10만 원이 넘는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상위 학원들은 학생들에게 원어민 이상의 수준을 요구하며, 보통 8세 1월부터 개강을 하는데 1학년들이 미국 4학년 이상의 수준으로 영어를 배운다.
 시중 교재뿐 아니라 학원 자체 교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직접 다니지 않고서는 학원의 티칭 방식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Top 3 외에도 Top 7, Top 10 등 암묵적으로 학원 순위가 정해져 있고, 대치동 외 타 지역에 브랜치를 내며 확장하는 경우 그 인기는 줄어든다. 대치동은 대치동에만 있는 학원에 프리미엄 가치를 둔다.


3.     학원마다 중점을 두는 영역이 조금씩 다르고, 보통은 다니다가 레벨테스트를 본 후 윗순 위 학원으로 점프업을 한다. 7세 고시 후 여러 학원에 합격했을 경우, 요일이 다르면 두 개의 학원을 병행하다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학원, 어떤 반 인지에 따라 아이의 현재 영어 레벨이 가늠이 되며, 이 때문에 엄마들 사이에서 엄청난 질투와 경쟁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4.     대부분의 학원은 셔틀버스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라이드가 필수이며, 대치역과 한티역 사이의 엄청난 교통량을 감수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다닐 수 있다. 오너가 같고 원장은 다르다는 4개의 학원이 유일하게 통합 셔틀버스를 지원하며, 각 학원 앞에는 자신의 키만 한 롤링백을 끌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불안이 극에 달한 아이를 어르고 달래 가며 두 개 학원의 레벨테스트를 예약했다. 나는 아이에 대한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엄마라 Top 10 학원은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제외했고, 라이드를 할 자신도 없었기에 내 남은 선택지는 셔틀버스를 제공하는 학원들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다.


두 선택지에서 한 곳은 떨어지고 남은 한 곳은 합격을 했으니 아이는 자연스레 합격한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학원 합격이겠지만, 내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전두엽의 발달이 느려 도파민이 부족했던 아이는 학습에 대한 동기가 부족했고, 그런 아이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주면서 아이의 영어를 끌고 갔던 건 나였다.

스스로 책을 잘 빌려오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빌려 오기 일쑤였던 아이 대신 나는 매일같이 학원을 드나들며 영어책을 대여하고 반납했다. 하원 후 책을 볼 생각이 전혀 없던 아이를 달래 가며 함께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고,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서툰 콩글리쉬 영어로 과장된 목소리 연기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이가 퀭한 눈으로 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지 물었다. 사실 나도 그 이유는 정확히 몰랐다. 

그냥 남들이 다 하니깐. 이미 시작했으니 중간에 관둘 수 없으니깐. 

설득력 없는 문장들이 머리를 맴돌다 사라지고 나는 그저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라는 실체 없는 말로 아이를 다독여야 했다.


대치동 영어학원은 숙제와의 전쟁이었다. 이미 그곳에서 나고 자라 빡빡한 숙제가 익숙한 아이들에게는 평범한 일과였겠지만, 대치동 초짜 둘에게는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숙제표를 보는 네 개의 동공은 초점을 잃었고, 두 개의 머리는 끄덕이는 횟수보다 갸웃대는 횟수가 많았다.



그래도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꾸역꾸역 숙제를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열심히 학원을 다니면서 아이의 영어는 점점 늘어갔다. 넷플릭스 영화를 보며 혼자 깔깔대고 웃기도 했고, 유명 유튜버들의 미국식 농담을 알아듣고 따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영어단어 외우기를 힘들어했고, 한국식 문법 수업이 시작되면서 영어 거부감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그렇게 누적된 피로감에 서로가 지쳤을 때쯤 드디어 남편이 동아줄을 내밀었고, 버티고 버티던 나는 그 동아줄을 덥석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곧 끊어질 듯 위태위태한 동아줄을 힘껏 붙잡은 채 멕시코라는 낯설고도 먼 나라로 떨어졌다.






멕시코 신생아로 다시 태어나 하루종일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해 잔뜩 기죽은 나, 완전히 바뀐 커리어로 정신 못 차리고 있던 남편과는 달리 씩씩한 표정으로 학교를 마친 아이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엄마, 아빠! 나 그동안 왜 영어 공부를 했는지 이제 알겠어!”


텅 비어있던 아이의 눈동자에서 그토록 그리웠던 빛이 어렸다.


까마득한 옛날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으면 끝을 알 수 없는 우주가 보였다. 아이만의 행성이 있던 곳, 행성 사이로 유성이 지나가고 부유하는 먼지 속에 은하수가 바다처럼 넘실댔다. 살아있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실로 아주 오랜만에 보는 생기 어린 두근거림이었다. 


아이의 세상이 다시 세워지기 시작하던 그날, 우쭐대는 교장 앞에서 나는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노라 수없이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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