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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동하다 Sep 19. 2023

잠시 외로워져도 되겠습니까

엄마, 며느리, 딸, 배우자에서 벗어나 첫 진짜 독립 [와이낫 모먼트]

외로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타인의 방해 없이 내 감정에 깊게 몰두해볼 수 있는 시간일까. 

사실 한국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았고

매일에 쫓겨 내 감정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가만히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었다. 

물론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서 그 짧은 틈을 못 견디고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거나 번개를 잡아버리는 그런 나지만. 

관계에 대한 관심과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가진 나란 사람. 


그런 사람이 홀로 미국에 왔다. 

하지만 내심 알고 있었다. 

나는 외로움의 판을 깔아줘야 비로소 이를 직면하고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닌 타인이 어느 새 우선 순위가 되어버리고 만다. 

여기까지가 2022년 6월에 쓰다 남긴 글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브런치를 켠 2023년 9월의 내가 이어서 쓴다. 


모처럼 틈내 '아기랑 운동'이라는 유튜브를 보며 백수린의 '시간의 궤도'를 필사하던 그 시절의 나.  

미국에 왔던 첫 날 밤을 기억한다. 

819 W Washington Ave의 노란 대문이 있는 집에 들어서 밤을 맞았다. 

매일 같이 살림살이를 정돈하는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고 배우고 싶은 살림 동선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 유리 닦이를 욕실 바닥의 머리 카락을 치우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구나'

'저마다 놓인 의자들이 상황별, 기분별 다른 기능을 할 수 있구나' 

사려 깊고 삶을 잘 정돈하는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면 외롭고 불안해서 당장 돌아가고 싶은 그런 밤이었다. 


에어비앤비 5일 안에 집도 찾고 은행 계좌도 터야 하고 차도 사야하는데 곧 땡스기빙 연휴였다. 

막상 와보니 5시 전부터 해는 지고 동네들은 사람의 흔적이 없고 카페 하나 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다음 날 같이 집을 봐주러 와주겠다는 친구 Y가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연락 드린 타사 선배에게서 따뜻한 답장을 받았다. 

"첫날은 마음이 싱숭생숭할 거예요. 하지만 지나가요. 푹 자요."

밖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소리에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대학 입학부터 정신없이 '발산의 삶'을 살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게 삶인지, 삶이 나를 관통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보다 실존적으로 말하면 일상에 매몰된 채

9년차 직장인

6년차 기혼 여성

3년차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아이가 조금 더 어렸다면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2021년 연말의 어느 날 

엄마, 배우자, 딸, 며느리 역할에서 잠시 떨어져 

불시에 떨어진 낙하산처럼 실리콘밸리 어딘가에 착지했다. 

돌아보니 이 역시 나의 엄마를 믿고 저지른 일이었다. 

내가 먼저 가서 정착을 하고 엄마와 아이가 미국으로 와 돌봄을 해주실 수 있겠지, 라는 이상적인 생각으로. 


실리콘밸리가 막연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탈출구가 필요했다. 나를 직면하기 위해서, 나를 돌보기 위해서 난 이곳으로 왔다. 

떠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좀 더 나중이었다. 


그렇게 기혼 여성으로서 독립심을 배웠다. 

외로움도 필요했다. 

스타벅스가 문닫는 시간부터 여는 시간까지 

와이파이도 데이터도 없이 생활하고 (우리 집 안에서는 당시 데이터가 잘 안 터졌다) 

냉기 가득한 바닥에서 바디럽 마약 매트 하나 깔고 잠을 청하고 다음날 일어나 전투적으로 눈 앞의 일들을 처리하고. 결정의 시간들을 미룰 수 없었다. 한국은 아직 새벽인 시간에 이곳의 오피스 아워는 끝나니까 남편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라는 찬스는 완전히 선택지 밖의 것이었다. 

처음 인터넷을 스스로 연결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외로움에 이어 기혼의 독립심은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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