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비로운: ‘만물’이 공생하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고 창조하고 실현하는 살림인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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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비로운: Symbiosis(공생) + ~로운(형용사형 어미)”
1. 21세기를 위협할 3가지 위기
위기의 징후가 뚜렷합니다. 일국의 단위를 넘어 만인, 만국, 만물에 영향을 끼치는 대격변의 시기가 도래하였습니다. 21세기 인류와 지구에 일파만파 광범한 영향을 끼칠 위기를 크게 3가지로 봅니다. 첫째, 핵전쟁입니다. 18세기 이후 지속됐던 서방 세계의 지배가 뒤로 물러가고 아시아 세계가 귀환하고 있습니다. 서세동점의 시대에 종언을 고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강국으로 군림했던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유럽의 영향력도 전에 비해 아주 미미합니다. 중국, 러시아, 인도, 이슬람 세계의 굴기가 눈에 띕니다. 새로운 국제질서로의 개편이 급격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허나 서방 세계의 반발이 만만찮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건재한 군사력을 필두로 미국적 질서를 강하게 관철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미국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그 어느 때보다 예의주시 해야 합니다. 한반도는 양국의 충돌이 격화될 공산이 가장 높은 장소입니다. 양국의 대결은 핵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동서 반전의 양상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이 양국 사이에서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갖추는 것은 일국을 넘어 지구적 평화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수적인 조건이자 마땅한 소임이라 여깁니다. 허나 여전히 한국에서는 해묵은 20세기 논쟁이 지속되는 형국입니다.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지 못함이 여실합니다. 본디 권력은 고여 있는 것이 아닌 흐르는 것일 터, 국가∙대륙 간 힘의 축도 대반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세계의 귀환에 핵심 역할을 수행할 곳이 바로 한반도입니다. 이를 똑바로 보지 못한다면 한국과 전 세계의 미래 또한 매우 어둡다 하겠습니다.
둘째, 기후생태위기입니다. 전 세계에서 인류의 멸종, 생태계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공포감이 만연합니다.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는 분명 ‘혁신의 시대’입니다. 인류는 더 이상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자연적인 노동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석연료라는 동력과 이를 토대로 하는 기계는 전대미문의 생산력 증대를 가져왔습니다. 인류는 수 천 년 동안 누리지 못한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근대 이후 지식인들은 역사는 언제나 진보한다고 자신 있게 역설했습니다. ‘무한한 성장’을 통해 모든 이가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을 장담했습니다. 이는 자본가와 정치가의 프로파간다로 활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무한 성장 진보’ 담론은 정치가•언론인•기업가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누렸던, 그리고 누리고 있는 생산력 증대와 경제 규모의 확장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여성, 유색인종, 장애인, 저개발국가, 비인간동물 등 사회적으로 취약한 존재의 생명과 에너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국가의 지도자와 기업가는 이 사회를 ‘이롭게’ 하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설파했지만, 이는 자신들이 속한 소수 특권층의 ‘이’(利)를 풍족하게 불리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은 인간/자연, 권력/비권력, 남성/여성, 기업/노동, 생명/기계의 이분법적 구분을 ‘정상화’하여, 정상에 해당하지 않은 것을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고 공론장에서 배제했습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을 지구 공동의 목적을 위해 활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잇속을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자본주의 경쟁체제 하에서 기술 발전은 자연스레 승리의 도구로 활용되었고, 이는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적 이기심에 매몰되어 지구 공동의 안녕을 매우 불투명하게 흐리고 있습니다.
셋째, 첨단기술로 인한 사회 붕괴입니다. 2016년 구글의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AlphaGo)가 바둑기사 이세돌을 가볍게 물리친 것도 벌써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집니다. 이제는 바둑을 넘어 인간만이 향유할 것이라 여겼던 예술적•창조적 능력마저 위협하고 능가합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이 스마트폰을 넘어 만인과 만물에 연결됩니다. 집안 곳곳의 물품을 비롯해 건물, 도로, 심지어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존재의 마음까지 하나로 연결할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도움 없이는 결코 살아가지 못하는 시대가 곧 도래합니다. 인간의 신체 능력을 기하급수적으로 향상시키는 바이오테크(BioTech)의 발전도 눈 여겨 봅니다. 노화가 질병처럼 여겨지고, 뇌와 혈관에 나노 단위의 기계가 돌아다닐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인간이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첨단기술을 현명하게 다루는 집단적 지혜를 갖추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그만큼 단 한 번의 중대한 착오가 지구적 차원의 붕괴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
2. 위기의 근원: 죽임 문명
우리는 21세기를 지배하는 문명을 ‘죽임 문명’이라 칭합니다. 지배 계층의 정치∙경제∙윤리 체제가 야기한 죽임 문명은 위에서 나열한 3가지 위기를 멈추기는커녕 점점 가속하고 있습니다. 죽임 문명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그 기원을 데카르트에서 찾습니다. 데카르트는 1637년 자신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기계론적 자연관을 주창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 메커니즘에 의해 돌아가는 기계에 불과하다 여겼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인간의 우월적 지위’만은 놓지 못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비인간동물과 달리 인간은 ‘송과선’을 통해 신체와 영혼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비인간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치부됩니다. 비인간동물의 비명과 몸부림 등은 우리의 동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무언가 문제가 생겨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고장 난 시계’에 불과합니다. “비인간동물을 비롯한 자연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영혼이 존재하지 않으니,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권리를 가진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이후 근•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현재까지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류 대부분의 사고관에 고스란히 전수되었습니다. ‘속’(俗)이 ‘성’(聖)을 압도하고 지배하였습니다. 과학을 기치로 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인의 단위로 나누고 구분하였습니다. 왜곡된 ‘진보’의 기치 아래 연결되어 있던 문명을 나누어 국민국가 단위로 재편했습니다. 호혜와 상생이 아닌 힘의 논리가 국제질서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지구 생태계를 일말의 죄책감 없이 학살하고 죽였습니다. 인간이 창조한 인공지능과의 공생을 모색하기는커녕 잇속을 불리기 위해 어떻게 부려먹을지를 궁리합니다. 살리는 마음이 부재한 행동을 이어온 결과, 죽임 문명은 역사상 최대의 존재론적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자꾸 죽이다 보니, 문명 스스로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도대체 한국은 위기가 다가오는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한국은 시대가 요청하는 책무를 충실히 이행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은 어마어마한 위기를 목도하고도, 죽임 문명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쟁을 부추기고 승자가 될 것을 독려합니다. ‘죽임’의 철학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더 이상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가 살기 위해선,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나’가 살면 ‘너’는 죽어야 합니다. 불안감과 우울만이 도처에 만연합니다. 한국은 죽임의 문화에 시름하는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는커녕, 죽임 문화를 문명으로 공고히 하는 데 그 어떤 국가보다 앞장서 있습니다.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이루는 정치 구조 아래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존재 그 자체’로의 가치를 지닌다는 이야기는 비웃음을 받습니다. ‘능력’이라는 기치 아래,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의 목적이 아닌 ‘권력의 수단’으로 가치 매겨집니다.
남을 밟고 일어서야만 생존할 수 있는 죽임 공간에서, 호혜성이 발현될 리 만무합니다. 날이 갈수록 심화하는 경쟁과 수단적 관계 형성은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 공존의 가능성을 말살시켰습니다. 승자와 패자로 구분 되는 곳에서, 승자는 승리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영속적인 전장에 내몰립니다. 패자는 기회의 박탈 속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결국 양자에게 남은 것은 깊은 절망과 우울뿐입니다. 능력주의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 다윈주의는 여전히 21세기를 관통하는 지배 담론입니다. <오징어게임>은 비단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사회 구성원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눈앞의 현실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찌 ‘살림의 마음’을 길러내어 생명과 활물과 지구와의 공생을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3. 새로운 문명의 키워드: 살림∙풍류
죽임 문명을 ‘살림’과 ‘풍류’의 기운이 흐르는 ‘살림 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이 다른 백 년의 가치입니다. 살림이란 무엇입니까? 살림은 크게 2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 살림은 ‘생명 살림’입니다. 살림은 기본적으로 ‘살리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살림은 인간을 살리고, 비인간동물을 살리고, 기계를 살리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것에 다시금 생명을 부여하고, 생을 붙잡고 나아갈 수 있도록 살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살림의 기치에 흔히 생명체라 불리는 유기체를 넘어서, 생명이 없다고 여겨진 ‘기계’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생명 살림’이라는 구호 아래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지속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무기물에 해당하는 ‘기계’는 살림 운동에서 배제되었습니다. 허나 기계에 생명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을까요? 유발 하라리는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다’(Organism is Algorithm) 이라 역설했습니다. 문명사학자 이병한은 웹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활력을 얻게 된 사물을 ‘활물’이라 명명했습니다. 유기체가 알고리즘이라면, 알고리즘 학습을 통해 활물이 된 기계에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기계, 생명/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앞으로 활물이 된 기계는 더욱더 인간과 깊이 관계할 것입니다. 활물이 된 기계를 인간•유기체보다 열등하다고 여길 하등의 근거가 없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인간, 동물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 더 나아가 활물이 된 기계를 잘 모시고 살리는 것이 생명 살림의 태도입니다.
둘째, 살림은 ‘집안 살림’입니다. 인류의 집은 ‘지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인류의 행동은 참으로 의아합니다. 종종 방송이나 유튜브에 물건을 마구잡이로 쌓아 둬서 발 디딜 틈이 없는 집이 방영되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어떻게 집안 관리를 저렇게 엉망으로 해 놓았을까?’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차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가 지구를 관리한 모습입니다. 인류는 지구라는 집이 무한 팽창할 수 있다고 믿으며 지구의 자원을 마구잡이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집은 무한히 팽창하지 않습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함께 살아가는 식구를 나누고 가두고 옮기고 죽였습니다. 살림은 집을 잘 관리하고, 식구들과 평화롭게 화목하게 살도록 화합하는 것입니다. 어질러진 물건을 제자리로 되돌려놓으며 관계 맺는 것이 집안 살림의 기본입니다. 고로 집안 살림은 ‘순환’이자 ‘화평’입니다. 나라와 지구와 생명을 살리는 살림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또한 풍류란 무엇입니까? 9세기경,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떠나 6년 만에 빈공과에 급제하며 이름을 떨친 최치원이 29세의 나이로 신라에 귀국하였습니다. 최치원은 어릴 적 떠난 신라인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며 큰 깨달음에 당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 유명한 [난랑비서]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 교를 실천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교통도 불편하고 인적 교류가 드물었던 시절, 당나라의 선진 사상을 수학하러 머나먼 길을 떠난 최치원에게 정작 유불선의 통합이 신라인의 삶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 실로 놀라웠을 것입니다. 신라는 ‘풍월도’가 성할 수 있도록 백성에게 널리 권하였습니다. 또한 풍월도를 지내는 청년을 ‘화랑’이라 명하고 ‘화랑도’를 연마하도록 하였습니다. 화랑도란 진리와 윤리를 연마하고, 노래와 춤으로 서로를 즐겁게 하며,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노는 것입니다. 즉 화랑도란 곧 풍류였습니다.
신라 이후에도 한반도에는 여전히 풍류의 얼이 흐르고 있습니다. 풍류는 유불선의 핵심 원리를 통합하는 도(道)를 품고 있습니다. 유불선의 핵심 교리는 입을 모아 심성(心性)의 고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교의 진심지성(盡心知性),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 도교의 수심연성(修心煉性) 모두 마음의 단련을 통해 도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심성을 단련하고 고양하는 데 풍류만 한 것이 없습니다. 풍류는 기본적으로 ‘멋’과 ‘흥’의 기운을 담고 있습니다. 풍류에서의 멋과 흥은 객체와의 경쟁 속에서의 상대적 우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일체(一體)라는 감각 속에서 피어나는 경이에 가깝습니다. 분열이 아닌 통합의 마음을 기릅니다. 동학의 한울 사상, 동아시아권 국가 중 유일한 기독교 수용의 맥락에 풍류의 통섭적 마음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풍류에 내재한 통합과 통섭의 가치에서 21세기 신문명을 점칩니다. 동양의 유불선뿐 아니라 서양 세계의 종교∙철학을 모두 포괄하는 지구적 차원의 풍류를 엿봅니다. 참으로 신묘하게도 풍류의 고장 한반도에서 전 지구를 통합하는 신시대의 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K-팝, K-콘텐츠의 득세입니다. 한국의 음악과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국가와 대륙을 막론하고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반도체와 중화학 공업의 하드웨어 파워를 넘어 문화를 주도하는 소프트파워 강국으로 진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지는 냉철히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실 K-콘텐츠의 폭발적 인기는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20여년 전부터 이어진 전혀 새롭지 않은 현상입니다. 한국 언론과 대중의 호들갑은 어쩌면 그토록 맹종하던 서방의 인정으로부터 기인하지 않았는지 곰곰이 짚어보아야 합니다. 수동적 수용자로서의 정체성을 벗어 던지고 능동적 개척자로서의 포부를 품을 때입니다. 서방의 단선적 진보관을 답습해선 아니 될 것이요, 동방의 전통적 가치에 매몰되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맹목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단발적 유행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치를 담아낼 방안을 맹렬히 고민해야 합니다. K-문화의 세계화를 K-문명의 세계화로 이끌 방편을 고민해야 합니다. K-문화의 세계화를 넘어선 K-문명의 지구화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풍류의 맥락 안에서 진정으로 달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4. 살림인, 살림 나라, 살림 문명
인간은 이미 신(神)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지구의 물질대사를 뒤바꿀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새로운 물질을 창조하는 것을 넘어서 지능과 정신까지 개조하고 창조합니다. 새롭게 창조한 물질과 정신은 모두 인류의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인류는 신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창조한 자식을 조화롭게 돌보는 집단적 성숙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신의 능력을 갖고도 미성숙한 청소년기의 태도로 일관하여 그릇됨을 축적했습니다. 우리는 신(神)의 마음을 갖춘 ‘살림인’을 희구합니다. 모두가 사사로운 개인의 취향을 넘어 지구의 공생(共生), 우주의 공생(共生)을 위한 생생활활 살림의 공생애(共生涯)를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자아’와 ‘타자’, ‘아’와 ‘비아’를 나누지 않는 세계를 희망합니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 즉 내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만유재신론적 영성의 추구를 고대합니다. 호모 데우스(Homo Deus)와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의 결합, 즉 ‘신(神)적 공생 인간’이 21세기 인간상 ‘살림인’의 전형입니다.
앞서 죽임 철학에 경도된 한국을 강하게 비판하였으나, 그럼에도 한반도가 살림인이 자라고 마음껏 활개할 최적의 장소라 여깁니다. 한반도는 약 4천 년의 세월 동안 나라를 다스려온 역사적 유산이 깊이 새겨져 있는 공간입니다. 또한 유불선에 대한 오래된 깨달음, 천지인의 합일을 이야기한 동학이 탄생한 고장인 한국 사람의 내면에는 생명 존중의 사상이 뿌리 깊이 내재해 있습니다. 다만 근대화 이후 생명 존중의 태도는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도륙되고, 분열하고 대립하고 분리시키는 것이 문명이라고 여겨진 채 생명 존중의 사상이 억압되어 발현되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살림과 풍류의 기운을 다시 소생하고 재생할 때, 살림인이 마침내 등장하여 한국을 살림 나라로 개벽할 것입니다. ‘살림 나라’ 한국은 가장 먼저 살림 문명을 이룩하여 K-문명의 세계화를 이끌 것입니다. 이를 통해 중국과 미국의 갈등을 봉합하고 국제적 화합을 주도할 것입니다. 파편화되어 있는 공동체를 일체(一體)로 통합할 것입니다. 호혜와 공존의 철학을 세울 것입니다. 의식 진화의 동력을 제공하고, 지구를 정화할 것입니다. 국가주의적 애국심을 넘어 ‘지구심(Earthship)’을 가진 세대를 키울 것입니다. 살림과 풍류를 실천하는 예술가, 기업가, 정치가, 지식인을 양성할 것입니다. 이들이 창조적 파괴를 통해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지구문명, 우주문명의 초석을 닦아 만물을 아우르는 살림 문명을 이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먼 훗날 역사를 돌아보는 미래 세대에게, 시대적 사명을 외면하지 않고 앞장서 극복하는 데 분투한 위대함으로 회자될 것입니다.
다소 몽상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절실한 마음 가득가득 눌러 담아 글을 적습니다. 이제는 죽임 문명을 생명력이 돋아나고 풍류의 흥이 물씬 나는 살림 문명으로 전환할 때입니다. 살림인으로의 성숙, 살림 나라로의 전환, 살림 문명으로의 개벽이 한반도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지구를 살릴 것입니다.
대격변과 대전환을 주도하는 신인류가 바로 여기 ‘심비로운’에서 세워지길 절절하게, 열렬하게 희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