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시라토리씨에게도 우생 사상이 있어?"
"응, 있는 것 같아. 아니, 있었어. 나도 맹학교에 다닐 때는 맹인답지 않은 것을 동경했거든. 예를 들어 전맹인 사람이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거침없이 다니거나 생선 가시를 깨끗하게 발라 먹는 걸 보면 대단하다고 부러워했어. 그리고 그런 걸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고. 그걸 뒤집어 생각해 보면, 맹인답지 않은 행동의 뿌리에 있었던 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비슷해지는 건 좋은 일'이라는 일종의 차별 의식과 우생 사상이었을지도 몰라."
가와우치 아리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장애를 극복의 대상이라 해도 되는가? 장애를 이겨내고자 한다는 건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열등하다는, 우생 사상이 내재된 생각인가? 이 문제를 처음 접했을 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가는 분들을 존중하며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넘어갔었다. 사실 장애인에 관련된 문제는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해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던 것에는 이 이유가 컸을 것이다. 그러다 최근에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라는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고찰을 하게 되었다. 장애라는 건 인간이 임의로 정한 개념이라는 관점에서, 더 넓은 의미에서의 극복에 대해 생각해 봤다. 과연 극복이라는 것은 이전 상태의 정체성을 흔들고 열등하다고 규정짓는 행위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계발은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다이어트는 마르지 않은 상태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미라클 모닝은 아침에 자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인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상태를 존중하며 현재 모습 그대로 정체되어야 한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생 사상과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진화론이 우생 사상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진화'라는 단어를 초판본에 쓰지 않아요. 영어로 evolution인데 evolution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요. evolution이 들어가야 되는 장소에다가 정확하게는 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고 적었는데, 수정을 통한 나아짐이랄까? 뭐 이 정도 느낌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왜냐면은 evolution이라는 말에는 무언가 더 좋아지는 듯한 느낌? 뭔가 방향이 있는 듯한 그런 뉘앙스를 주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근데 워낙 사람들이 evolution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다 보니, 또 한 단어로 착착 붙잖아요? 결국엔 이 단어로 귀착되는데, 후회하죠. 이걸 나중에 후회하고 뒤에는 쓰긴 쓰는데 계속 안타까워해요. 여기에는 어떤 나아진다는, 진보한다는 개념은 없다.
<알쓸인잡> 1화, https://www.youtube.com/watch?v=trOKkWtOaY4&t=959s
최근에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표류하다가 과학드림 채널의 고생물 영상에 빠졌다. 이 채널의 영상들에서 생물의 진화와 자연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선택압을 받는다'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압은 마치 원심력처럼,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설명의 편의를 위해 만든 개념이다. 예를 들면 목이 긴 기린들이 높은 나뭇잎을 먹을 수 있어서 살아남은 상황을 설명할 때, 높은 나무들에 의해 기린은 목이 길어지는 선택압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가상의 개념일 뿐이고, 실제로 자연에는 어떠한 의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면에는 도태와 죽음과 멸종이 있을 뿐이다. 최재천 교수님이 회사에 오셔서 강연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자연스럽다는 게 옳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았었다. 진화는 나쁜 것을 극복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시체로 쌓아 올린 처절한 발버둥일 뿐이다. 어쩌면 처음에 말한 우생 사상과 자기 계발의 차이도 비슷한 느낌으로 접근해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전과 이후 상태에 어떠한 우열을 두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발판 삼아 지금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방향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점점 더 우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descent with modification, 변화의 흐름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이 변화의 의지는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변화의 이유와 목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어린 학생이 학창 시절에 왜 공부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일단 학생의 본분이 공부라는 말은, 우생 사상과 다를 바 없는 최악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배워둔 지식이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만으로 납득하기에는 우리 스스로 이미 학창 시절에 배우고 외웠던 많은 공식들을 까먹은 채로 살아도 큰 문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한 학창 시절 공부의 이유는 증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사회에 나오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나는 취준생 때 왜 아직도 손오공에 나오는 스카우터가 개발되지 않았는지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취직이 아닌 창업을 한다 하더라도 투자를 받거나 동업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증명을 해내야 한다. 그리고 이 증명의 과정에서 학벌, 성적을 비롯한 스펙들은, 비록 예외가 발생하기는 하더라도 가장 가성비가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공정성이나 형평성의 문제를 제쳐두고 생각해 봤을 때, 기업의 입장에서 이러한 수치적인 것으로 1차적인 판단을 함으로써 많은 비용을 아낄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따라서 학창 시절에 성적이 좋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우월하거나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증명의 비용이 필요한 환경에서 적응해 살아남기에는 좋은 수단이라고 말해줄 것 같다.
적응의 수단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천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화한 생물도 있고 위장색을 갖추도록 진화한 생물도 있지만 한 쪽이 옳거나 틀리다고 하진 않는다. 위의 경우에서도, 학창 시절의 공부는 내가 생각하는 증명의 비용을 줄이는 수단일 뿐, 또 다른 방법으로도 증명의 비용을 줄일 수도 있고 혹은 증명의 비용이 필요 없는 방향으로 적응해 나갈 수도 있다. 이처럼 단순히 '학생의 본분이니깐'과 같은 말로 얼버무리지 않고 변화의 정확한 이유와 목적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다른 방향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이 틀리지 않고 다를 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은 온전한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다리는 형체죠.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자유로움이에요.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요.
천선란, <천 개의 파랑>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적응은 환경과 개인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아닌 환경의 변화로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고, 이 방향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당불내증이 있다. 아직 대체유가 없는 곳들이 많아서 카페에 가면 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된다. 최근에 다녀온 호주는 달랐다. 호주는 다양한 인종들이 살아서인지 갔던 모든 카페에 대체유가 있었다. 단순히 대체유가 있는 것뿐만 아니라 oat milk, soy milk 등 다양한 종류의 대체유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호주에서 유당불내증이 불편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장애에 대해서도 이러한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유당불내증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라떼를 먹고 싶었던 것처럼, 그들은 비장애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불편함을 덜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특히 혁신이라는 이름이 달린 것들은, 이미 편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편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냄으로써 편했던 사람도 불편하게 만들어 수요를 창출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이미 불편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아직 미숙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