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박 8일의 호주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그동안 해외여행에 대해, 의문보다는 부정적이고 의구심보다는 중립적인, 뭔가 갸우뚱하는 마음이 있었다. 해외여행은 아무래도 시간 면에서도 비용 면에서도 수고 면에서도 자원이 많이 든다. 과연 그만큼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최근에 다녀온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국내 혼독 여행의 만족도가 높아서 이런 생각이 더더욱 들었던 것 같다. 아직 우리나라에도 못 가본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한 삐딱한 자아는 이런 생각도 해봤다. 해외여행에 만족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소모한 자원에 대한 정당화를 하기 위해 자기 최면을 걸은 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이번 여행은, 해외보다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길게 여행을 간다는 것에 더 의미를 뒀었다. 그래도 직장인의 입장에서 해외를 간다는 건 서로 시간을 맞춰서 길게 휴가 내기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편도 11시간의 긴 비행. 비행시간이 길어서인지 항공사가 비싼 항공사는 아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체가 생각보다 덜컹거렸다. 여행 마지막 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롤러코스터처럼 장기가 붕 뜨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급하강을 해서 주변 승객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난 이런 흔들거림에 내 몸을 맡기는 걸 즐기는 편이라 오히려 좋았다. 비슷한 느낌으로 지하철이나 기차보다 버스를 타고 도로의 굴곡을 그대로 느끼면서 사색하는 걸 좋아한다. 지금 차가 오래된 차라 승차감이 좋지 않은데도 별 불만 없이 몰고 다니는 데에도 이 성향이 한몫했을 것이다. 쓰다 보니 왠지 승마도 좋아할 것 같다. 지금 벌여 놓은 일들 어느 정도 수습하면 도전해 봐야겠다.
비행시간을 보고 처음 생각난 건 독서 계획이었다. 모든 책을 종이 책으로 읽는 편인데, 종이 책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는 책이나 상황에 맞는 책갈피를 고르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어떤 책갈피를 챙겨갈지 수집함을 둘러보다가 너무 완벽한 친구를 발견했다.
책갈피를 고른 다음 둘러본 건 독서등이었다. 아무래도 장시간 비행이면 분명 수면을 위해 불을 끌 것이다. 자리마다 천장에 독서등이 달려있긴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딱 내 책만 비출 수 있는 걸 찾다가 아래와 같은 제품을 발견했다. 사용 후기는 대만족이었다. 책 페이지만 딱 비추는 약한 조명인데다가 간접등이어서 눈이 부시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빛이 튀지도 않았다. 가는 길에도 오는 길에도 정말 잘 사용했다. 다만 침대에는 이미 독서용 조명 세팅을 다 해둔 상태여서, 비싼 가격에 비해 자주 사용하진 않을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호주에 도착하고 나를 처음 자극한 건 역시 가장 예민한 감각인 시각이었다. 특정 대상이나 풍경 때문이 아니라, 보이는 시야의 채도가 높아서 놀랐다. 미세먼지가 적고 햇빛이 강해서인지, 찬란하다는 표현이 저절로 생각날 정도로 어디를 봐도 색채가 뚜렷했다. 놀러 다닐 때 사진을 잘 안 찍는 편이다. 사진첩을 거의 되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는 사진 찍을 시간에 눈에 더 많이 담자고 생각했다. 아직은 시력이 좋은 편이어서 나빠지기 전에 더 많은 걸 담아두자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여행 가기 전 좋은 사진 공유해달라는 친구의 말에 '제가 사진을 잘 안 찍는 편이라서요 ㅋㅋㅋ'라며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특히 호주의 광활한 자연을 만났을 땐 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다.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재료가 너무 좋아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인간도 코알라도 산도 바다도, 자연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물리학, 그중 상대성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수많은 존재 중 유일하게 독보적인 지위를 지닌 것이 있다. 바로 빛이다. 모든 시공간은 빛을 기준으로 정립된다. 또한 빛은 내 가장 예민한 감각인 시각을 자극하는 근원이다. 그래서 나는 빛을 활용한 작품들을 특히나 좋아한다. 이번에도 빛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보기 위해 열심히 찍어봤다. 사진도 언젠가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은 분야 중 하나다. 다만 이렇게 언젠가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은 분야가 너무 많은 게 문제다.
시각 다음으로 나를 자극한 건 의외로 후각이었다. 어릴 때부터 만성 비염에 시달려서 군대에서 귀를 다치기 전까지 후각은 내게 가장 둔감한 감각이었다. 그러다 향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한 친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자습하고 있는 친구들 뒤에 몰래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는 장난을 종종 치곤했다. 하지만 몇 번을 해도 잘 놀라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친구가 후각이 예민한 편이었는데, 내 체향이 강한 편이라 보지 않아도 다가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처음 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체향을 인지할 수 없다. 내향인의 고질병이 도져서 나만 모른 채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것에 대한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 그 이후로 샴푸나 바디워시에 써진 향은 물론 디퓨저나 향수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창작자의 DNA에 이끌려 나만의 향수까지 만들어 쓰게 됐다.
다시 호주로 돌아와서, 공항에 내려서 우선 호텔에서 짐을 풀고 씻은 다음 일정을 소화하려 했는데, 호텔에 비치된 어메니티가 모두 타바코&샌달우드 향이었다. 바닐라처럼 부드러운 향을 선호하는 편이라 타바코 향에 살짝 거부감이 들었지만,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다녀보자는 마음으로 사용해 봤다. 사실 따로 샤워용품을 챙겨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 샌달우드 향은 좋아해서인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첫째 날 일정을 소화하고 호텔이 있는 역에서 내렸는데, 호텔 쪽 출구로 나오자마자 타바코 향이 확 났다. 아마도 모든 투숙객이 이 향을 뿌리고 다녀서 호텔 근처에 향이 밴 것 같다. 향수는 향이 감돌게 하고 향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걸어가다가 타바코 향을 맡으면 호주가 생각날 것 같다.
호주의 가장 큰 특징은 여유가 많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카페는 2~3시면 문을 닫는다. 식당이나 마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게들도 5시면 문을 닫는다. 도시 곳곳에 싱그러운 공원도 많았고, 공원에는 가족과 함께 놀러 온 아이들이 많았다. 유명한 관광지를 가지 않아도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 뛰노는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 여유에 녹아들어였을까. 대자연의 풍경이나 코알라 쓰다듬기, 샌드 보딩 등의 활동도 재밌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저녁시간에 친구들과 보낸 여유였다. 호주는 인건비가 비싸서인지 외식 비용은 비싸지만 마트에서 판매하는 소고기를 비롯한 식재료들은 굉장히 저렴했다. 매일 밤 친구들과 소고기와 아스파라거스를 왕창 구워 먹으면서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맥주와 와인을 나누고, 보드게임까지 야무지게 즐겼다. 아무 걱정 없이 보낸 이 여유로운 시간 덕분에 충전이 많이 됐다. 아마 이 여행의 올해의 마지막 여유일 것 같다. 이제 충전한 에너지로 올해를 잘 마무리하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