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타 Feb 25. 2024

조각 사유

법과 관련된 작품들을 보다 보면 위법성 조각 사유라는 단어를 보곤 한다. 위법성은 말 그대로 법을 어겼다는 뜻이고, 사유는 원인/이유를 딱딱하게 부르는 용어로 그래도 익숙하다. 근데 조각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갑자기 들어가 있으니 얼핏 보면 이상하게 느껴진다. 여기서의 조각은 무언가를 깎아서 만드는 예술의 형태를 의미하는 조각도 아니고, 큰 덩어리에서 나온 작은 부분을 뜻하는 조각도 아니다. 조는 "그간 격조했습니다."의 격조에서 사용되는, 막혀있다는 뜻의 조다. 각은 망각/기각/소각 같은 단어에서 사용되는, 물리친다는 의미의 각이다. 즉, 조각은 막거나 물리친다는 의미로, 위법성 조각 사유는 위법을 해서 위법성이 있긴 한데 그걸 막거나 물리칠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위법성이 성립했지만 그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했을 경우 위법성 조각 사유에 해당되어 처벌되지 않는다."처럼 사용할 수 있다.


'조각 사유'라는 말을 오랜만에 봤을 때 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 드는 생각의 조각들을 모았다가 뭉쳐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즉, 조각조각 사유하는 사람이기에. 조각과 사유 둘 다 여러 뜻이 있고, 두 단어에서 모두 다른 의미를 채용했더니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비슷한 의미,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선호하는 단어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말의 끝맺음에 "좋은 주말 보내세요."라는 표현도 사람마다 개성이 있다. 좋은, 행복한, 편안함 등등. 일상에서 거의 본 적 없는 단어지만 따듯함이 묻어나서 좋았던 건 '안온'이라는 표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평안'을 자주 사용한다. 무탈함이야말로 가장 욕심 없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에도 다양한 표현이 있다. 생각, 고찰, 사유, 천착 등등. 그중 '사유'를 가장 좋아한다. 한자여서 그런지 받침이 없는 깔끔한 단어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갈한 대나무 숲에서 정좌하고 있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게다가 사유에는 또 다른 세 번째 뜻인 개인 소유라는 의미도 있어서, 단순히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뭔가를 얻어서 내 안으로 흡수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좋다.


오랜만에 BAR CHAM을 다녀왔다. 외국인이, 아니 한국인이라도 칵테일 바를 추천해달라 하면 1순위로 해줄 바. 시그니처 칵테일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으로서 시즌마다 고유의 이야기가 담긴 시그니처 칵테일들을 개발한다는 점이 너무 좋다. 이번에 마신 칵테일 중 가장 기억에 남은 메뉴는 '송편'이었다. 메뉴판을 둘러보다가 송편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안 시킬 수가 없었다. 고체인 음식인데다 식감도 중요한 송편을 과연 칵테일로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송편을 딱 처음 베어 물었을 때와 똑같은 맛이 났다. 이건 절대로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라, 궁금하시다면 메뉴가 바뀌기 전에 꼭 가서 드셔보시길.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걸 좋아해서 하루에 같은 칵테일을 시키는 일이 거의 없는데, 몇 년 만에 같은 걸 한 잔 더 시켜서 마실 정도로 감명받았다. 내 시그니처 칵테일이 있는 바를 차리는 게 꿈인 사람으로서, 나는 과연 이런 칵테일을 창작할 수 있을까 하면서도 역시 창작을 좋아한다면 칵테일이라는 분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인생 목표가 있냐는 질문에, 40대에 40억을 모아서 개인 칵테일 바를 차리는 게 목표라고 했었다. 그랬더니 요즘도 종종 '그러면 저는 옆에서 커피 내릴게요', '저는 발레파킹 담당할게요' 하면서 장난치시곤 한다. 지금은 내가 봐도 장난처럼 느껴지는 발언이지만, 당시에는 꽤나 고민한 끝에 나온 수치였다. 40대나 40억이라는 수치는 없어졌지만 칵테일 바는 여전히 진지한 꿈이다. 자신 있게 진지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언젠간 해야지 하는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 바라는 컨셉 안에서도 다른 북 바와 차별점이 될 수 있는 내 바만의 철학을 고민하고, 고민에서만 끝난 게 아니라 이 철학을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지 테스트하기 위한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40억을 모아서 한 번에 은퇴하고 시작하기보단, 작게 시작해 보기 위한 6~7평 정도 상가 매물도 주기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출퇴근길에 듣는 음악도 뉴에이지를 들으면서, 내가 생각한 바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들을 고르고 있다. 작은 걸음이라도 착실하게 다가가는 중이다.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는데 걸린 시간은 짧게는 4년, 14년까지도 추정된다. 어쩌면 그 끈기와 꾸준함으로 인한 완성도가 모나리자라는 명작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나는 내 안의 사유지에 조각상을 두고 있다. 여러 개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칵테일 바의 조각상이다. 언제 완성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꾸준히 조각하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만들기 시작해야지 하면서 놔두는 게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차근차근 깎아나가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나가고 있는 나만의 조각상을 사유하기에, 진지하고 자부심 있게 칵테일 바가 내 꿈이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다. 나의 또 다른 '조각 사유'는 꿈이다.

작가의 이전글 천사와 악마, 탕수육과 짜장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