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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Jun 15. 2024

글의 여백

"혹시 선재 업고 튀어 보셨나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다 보면 헤어 디자이너 분과 스몰토크를 나누곤 한다. 이런 스몰토크에서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잘 먹히는 주제 중 하나다. 다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이 많이 쌓여서 시간이 남으면 거의 책만 읽다 보니 영화, 드라마, 예능 등은 안 본 지 꽤 됐다. <선재 업고 튀어>를 비롯해서 네다섯 개 정도 시도하셨지만 결국 전부 실패하고 다시 침묵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문득 글을 읽는다는 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숏폼, OTT가 점점 퍼지는 지금 글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글을 읽는 건 영상을 보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글의 매력은 무엇일까.


책을 한번 봐봤다. 읽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영상이나 그림 보듯이 봐봤다. 보기만 해보니 새삼 빈 공간이 많다는 게 느껴졌다. 한글은 물론이고 내가 아는 다른 언어에도 속을 색칠하는 글자는 없다. 모두 가느다란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픽셀 하나하나 가득 채워져있는 영상과 달리 글은 대부분의 공간이 텅 비어있다. 전체에서 까만 부분을 모으면 20% 정도는 될까. 그럼에도 우리는 글에서 충분한 존재감을 느낀다. 어쩌면 그 여백을 우리가 생각으로 채우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상은 모두 같은 장면을 본다. 인물의 모습도 모두 같은 걸 느낀다. 글은 다르다. 가령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녀"라는 묘사를 읽으면 사람마다 생각나는 모습이 다를 것이다. 글의 내용과 각자의 경험, 지식을 통해 장면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익숙해지면 이제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어도 자연스럽게 글의 내용과 내 생각을 결합시켜보게 된다. 그래서 글은 마치 음식 같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꼭꼭 씹어서 내 안으로 흡수시키는 걸 보면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다. 사람마다 먹는 속도가 다르듯이 글도 사람마다 읽는 속도가 다르다. 러닝 타임이 정해져 있는 영상과는 다른 부분이다. 같은 글 안에서도 그 문장이 내 생각과 얼마나 엉기는지에 따라 흡수하는 속도가 달라진다.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일시정지하면서 보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책은 가끔씩 어떤 문장을 만나면 덮어두고 몇십 분 동안 생각에 잠기곤 한다. 두세 번 다시 읽으면서 되새김질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을 들고 다시 글을 보면 페이지가 가득 차 보인다. 나는 이게 글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내용을 보더라도 서로 다르게 느끼고 각자의 재해석으로 여백을 채우는 것. 독서모임 같은 곳에서 서로 어떻게 다르게 채웠는지 나눠보면 그 매력은 두 배가 된다.


글에 대한 생각이 늘어난 건 요즘 공모전에 낼 목적으로 단편소설을 쓰는 중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제대로 써보는 건 처음이라 잘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 특히 쓴 글을 읽어봐도 모든 내용을 아는 상태에서 읽는 거라, 뒤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전혀 감이 안 오는 게 제일 어렵다. 그래서 며칠 전 만난 친구에게 지금까지 쓴 부분을 보여줬다. 차근차근 빌드업을 쌓아나가는 게 마치 장편 소설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그동안 거의 장편소설만 읽어서 그 형식이 익숙해서였을 것 같은데, 단편소설은 분량이 길지 않으니 좀 더 연결에 여백을 두면서 말하고 싶은 주제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너무 정확한 말이었다. 그동안 읽던 책뿐만 아니라 이런 에세이를 쓸 때도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형식으로 쓰던 편이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쓰게 된 것 같다. 게다가 단편소설을 쓰겠다고 해놓고 단편 모음집이라는 걸 지난달에 처음 봤다. 심지어 학생 때부터 자주 보던 소설들은 장편 중에서도 10권, 20권이 넘어가는 정말 긴 작품들이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단편 소설들을 읽어보면서 장면의 여백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봐야겠다.


여담으로, 친구가 직설적으로 말해도 되냐고 물어본 다음 내가 괜찮다고 해서 피드백을 들었는데, 해주고 나서 이런 얘기에 정말로 기분 안 나빠하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사실 나도 신기했다. 예전에 [나는 ... 을(를) 함께 나눌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문장에서 빈칸을 "지적"이라고 채웠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내 문제점을 모르고 그대로 살아가는 게 더 싫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렇게 생각해도 사람 감정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정말로 피드백을 받았을 때 기분 안 나빠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다행히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정확히는 어떻게 수정할지 아이디어가 계속 샘솟아서 기분 나쁠 겨를이 없었다. 친구가 '지금 빨리 가서 글 쓰고 싶지'라고 한 걸 보면 티가 났나 보다. 몇 달 정도 책 읽고 글만 쓰면서 보내고 싶은데 요즘 일도 외부 활동들도 바쁜 시기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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