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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Sep 01. 2024

천천히, 느리게, 돌아보며

"조금 다른 연습을 하던데요."
"예?"
"가장 느리게 뛰는 연습요."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지난달 <천 개의 파랑>이라는 소설로 독서모임을 했다. 오랜만에 읽는 SF 소설이라 어색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순문학의 색채가 짙게 묻어있어 예상치 못한 아림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SF에서 나오는 메시지의 결은 잃지 않아, 최선두의 기술인 AI를 업으로 하는 입장에서 고민할 거리도 많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를 꼽으라면 '천천히 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 '천천히 달리는 것'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었다.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입장에서, 혹은 기술 발전의 입장에서 '천천히'의 중요성은 세심하면서도 깊숙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개인의 흐름이고, 소설 속에서도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하는 경주마 투데이 또한 결국 개인인데, 개인의 입장에서 천천히 달린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당연히 '천천히'나 '느리게'라는 표현이 붙는 모든 것들을 다 옳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개인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천천히'란 무엇일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면 쉽게 넘어갔겠지만 뭔가 알듯 말듯 말듯 알듯한 느낌의 지적 간지러움이 생겼다. 독서모임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 뒤로 책도 두세 번 더 읽어봤지만 어렴풋하게 그려지다가 아스라이 흩어질 뿐 명확한 답을 내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을 넘게 고민하다가 보관함에 넣어두고 포기하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힌트가 나왔다.


며칠 전 슈카월드 코믹스에서 하는 <주식은 지금>을 보다가 호가가 사라지는 괴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호가가 사라지는 괴담이란 어떤 주식이 2000원에 있어서 사려고 하는 순간, 2000원에 있던 매물이 사라지고 2100원으로 가격이 올라가있는 현상을 뜻한다. 물론 주식시장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매매를 하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할 순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한 트레이더가 느끼기에 우연의 일치라 하기엔 너무 빈번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종종 겪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현상에 대한 의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여기서 트레이더란 간단히 말하면 기관을 대행해서 대규모의 주식 매매를 진행하는 사람으로, 기관에서 희망한 가격보다 얼마나 더 좋은 가격으로 거래를 체결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성과가 결정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격 변동에 대해 예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고, 실제로 면밀히 들여다본 결과 단순한 기분 탓이나 우연이 아닌 명확한 범인이 있는 현상임을 밝혀냈다.


범인은 HFT(High Frequency Trading)였다. HFT란 정해진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거래를 체결시키는 프로그램을 뜻한다. HFT는 어떻게 호가가 사라지는 현상을 만들어냈을까.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메이저만 17개 이상일 정도로 거래소가 많다. 또한 공정한 거래를 위해 트레이더가 특정 거래소와 편파적으로 거래하는 것을 규제한다. 따라서 트레이더가 대규모로 주식을 매매하면 여러 거래소에 분산되어 주문이 들어간다. 여기서 문제는 통신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여러 거래소에 주문이 완벽하게 동시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레이더가 어떤 주식이 2000원인 걸 보고 이걸 사겠다는 주문을 1시에 했을 때 A 거래소에는 1시 3분, B 거래소에는 1시 5분에 도착했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작은 1ms 미만의 단위에서 일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한 HFT 프로그램이 A 거래소에서 1시 3분에 트레이더가 대규모 매매했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 1시 5분이 되기 전에 B 거래소로 가서 2000원에 있던 모든 매물을 먹고 2100원에 올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정해진 시간 내에 매매를 완수해야 하는 트레이더는 눈물을 머금고 2100원에 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HFT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거래소 간 통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트레이더보다 빨라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HFT보다도 빨라야 이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몇 개월마다 컴퓨터를 최신으로 교체하고, 가장 빠른 회선을 찾기 위해 통산사를 수시로 교체하거나 큰 비용을 들여 전용 회선을 깔기도 하고, 물리적인 영향도 있기 때문에 더 속도가 빠른 사무실을 위해 수십만 달러를 지불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빠르게'가 굉장히 중요한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트레이더도 이 '빠르게' 전쟁에 참전해서 이겨야만 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반대로 '느리게'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예를 들어 위에처럼 A 거래소에 가는데 3분, B 거래소에 가는 데 5분이 걸린다면 A 거래소로 가는 회선을 빙빙 꼬아서 5분이 걸리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더 빠르게 가는 것은 어렵지만 원하는 만큼 느리게 가는 것은 비교적 수월하고, 트레이드의 근본적인 목적은 거래를 빠르게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깨달았다. 천천히, 느리게 간다는 것은 돌아보는 것이구나.


오로지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그 현장에 서 있을 수 있는 속도. 완주를 하더라도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있는 속도.
투데이의 목표는 시속 30킬로미터였다.

천선란, <천 개의 파랑>


바느질에서 박음질을 보면 촘촘하고 정갈한 앞면과 달리 뒷면은 겹겹이 지저분하다. 개인으로서 천천히 달린다는 건 이 뒷면처럼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반발짝 되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빠르게 작품을 완성하려면 시침질로 때우면 된다. 그러나 굳이 귀찮게 박음질을 하는 이유는 속도가 빠르면 좋긴 하겠지만, 그보다 품질과 깔끔한 모습이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빠르기에 매몰되어 채찍질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자신을 되돌아보며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그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찾아나가는 것이 개인으로서 추구하는 천천히 달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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