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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는 일정표, 마음에는 느낌표

미국인 친구 서울 투어 가이드 후기

by 리타

얼마 전, 생각지 못한 부탁을 하나 받았다. 한국에 처음 오는 미국인 친구가 있는데, 그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곁에서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미국인 친구의 일정과 내 스케줄을 맞춰보니, 낮에는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휴가를 쓸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망설여지지 않았다. 부탁을 건넨 분들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할게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여러 가지 따져볼 이유도 없었다. 특별한 계획이나 방법은 없었지만,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시작된 일주일. 그리고 정말, 어떻게든 되었다.


처음엔 서울을 누군가에게 소개할 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 년을 살았고, 지하철 노선도 익숙했고,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며 자취도 오래 했으니까. 하지만 여행 일정을 짜고 친구가 원하는 장소들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이 도시에 대해 참 무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인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흥미로웠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익숙하고 당연한 일상이었던 곳들. 미국인 관광객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익숙했던 풍경이 낯설어졌고, 낯설었던 감각이 오히려 나를 깨우는 듯했다. 그렇게 나도, 그와 함께 서울을 다시 여행하게 되었다.


일주일은 짧았지만, 그동안 한 사람을 온전히 책임진다는 것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외국인 친구와 함께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평일 낮,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나누며 도와준 나의 친구들이었다. 말도, 문화도 달라 서로 어색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미국 친구를 맞아주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곳인 DMZ 투어도 할 수 있게 했고, 경복궁에서 전통 한복을 입고 함께 걸기도 했다. 남산에서 서울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도 마련했다. 청와대는 혼자 다녀올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었고, 미용실에도 데려가 한국의 소소한 일상도 경험하게 했다. 친구가 다니는 교회 예배에도 참석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고, 어느 날은 또 다른 친구의 아이 돌잔치에도 함께 갔다. 내가 시간을 낼 수 없을 때, 서울과 경기도에 사는 친구들이 미국 친구와의 서울 투어 일정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함께 해주었다.


그리고 직접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보태준 분들도 있었다. 아이디어를 나누고, 지인을 소개해주고, 내가 허둥지둥할 때 중심을 잡아주는 말을 건네준 사람들. “괜찮아, 같이 해보자.” 그 한마디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순간이 있었다.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할 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도움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그 덕분에 미국 친구가 한국에서 외롭지 않게, 함께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친구를 위해 일정을 계획하고,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일정을 조율하며 정신없이 지냈다.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한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을 쏟았다. 그런데 미국 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멈추자, 익숙했던 일상이 낯설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했던 시간이 끝났을 때 느껴지는 텅 빈 감정. 마음 한구석이 잠시 비워진 듯했다. 이런 감정은 나뿐만이 아니라 서울 투어를 함께 도왔던 다른 친구들도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모두 그 시간에 집중했던 것 같다.


미국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그간의 일정을 정리하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이곳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탈북민이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꽤 되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조금은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나 스스로를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이방인 같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그런데 친구에게 한국을 소개하며, 나도 모르게 “우리나라”, “우리 문화”라는 말을 쓰며 뿌듯해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벅찼다. 어쩌면 그게 '국뽕'이라 부르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음식을 추천하면서, 선물을 고르면서, 데려 가고 싶은 곳이 많아서 고민하는 모습이 괜히 들떠 보여 스스로가 신기했다. 이곳이 이제 내 집이라는 걸, 나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걸 그렇게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번 여정을 통해 새롭게 배운 것이 있다. 타인을 돕는다는 건 단지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 시간을 쓰는 것도, 수고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건 마음을 담아 함께 걷는 태도라는 것을. 누군가의 삶에 조용히 발을 맞추는 일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를 깨달았다. 나와 함께해 준 사람들의 진심을 떠올리면 그 의미가 더 또렷해진다. 도움을 주는 존재가 없었다면, 나는 미국 친구에게 좋은 기억을 선물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친구에게는 한국에서의 첫 여행이었고, 나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낯선 이의 여정을 돕는 과정 속에서 나는 어느새, 환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이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고 손을 내민다는 것. 그 일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다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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