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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은 Nov 19. 2023

교사인 나, 자연인 나.

1. 교사인 나 vs 자연인 나 


작년 이맘때, 오랜만에 연극치료 선생님을 만났다. 그간의 근황을 말하며, 일터 안의 '교사로서의 나'와 집에 돌아온 '자연인 나'를 분리하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on 아니면 off로 나누는 기계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자꾸 교실의 일을 집까지 끌어오니 잘 쉬지 못했다. 그러면 교실로 돌아갔을 때 예민해지는 역순환이 반복되었다. 


연극선생님은 내 말을 듣더니 두 개의 나무인형을 꺼냈다. 유성매직 상자도 함께 내밀었다. 그리고는 내게 ‘교사의 모습’과 ‘교사가 아닌 내 모습’을 각각 인형으로 나타내보라고 말했다. 움직이는 인형이라 동작도 표현할 수 있고 마음껏 꾸며도 된다고 했다. 


나는 '교사인 나'가 먼저 떠올랐고,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네모난 가슴팍에 커다란 방패를 그렸다. 등에는 슈퍼맨, 배트맨, 수다맨 등 각종 맨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망토를 생각하며 붉게 칠했다. 어떻게든 나를 지켜야 할 것만 같았다. 교실 안에서 최대한 힘 있게 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두 다리가 자꾸 주저앉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표정을 어떻게 그려야 할까 망설였다. 


‘교사인 나’를 내려두고, 나머지 인형으로 넘어갔다. 교사가 아닌 ‘자연인으로 나’. 교실에서 분리된 내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입꼬리를 먼저 그렸다. 그리고 가슴에는 방패대신 노란 색깔의 별을 그렸다. 두 인형 모두 붉은 망토를 등 뒤에 매달고 있었다. 별을 가슴에 단 ‘자연인 나’는 언제든 망토를 펼치고 날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반면 ‘교사인 나’는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교사인 나’의 망토 뒤로 지지해 주는 여러 사람의 손모양을 무늬로 그려 넣었다. 가족, 동료, 학생들, 내게 힘을 주는 고마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결국 다리 한쪽은 주저앉은 인형을 ‘교사인 나’로 표현했다. 남은 한 발로 아무리 일어서려고 해도 거대한 힘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제야 교사인 나의 얼굴을 마저 완성했다. 울거나 화낼 의욕도 잃어버린 지친 입꼬리. ‘-’       

2. 괜찮은 척했지만 쌓였던 작은 상처들       


당시 우리 반에 큰 사건이 있던 건 아니었다. 물론 큰 사고로 번지지 않은 작은 사건들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빵칼에 성냥을 그어 불이 붙은 일(다행히 교실이 불타지 않았다), 복도에서 학생 혼자 실내화를 띄우며 놀다가 형광등이 깨진 일(인류에겐 던지기 유전자가 내재하는 게 틀림없다. 학기 초부터 물건을 던지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보이는 곳에서 던지고 논다), 문짝이 뜯어지고, 급식차가 넘어진 일 등등(모두 다친 아이는 없어서 뉴스에 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골치 아픈 사건은 아니었다. 친구들끼리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것도, 누군가를 심하게 괴롭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감정제어가 되지 않는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학생도 없었고, 수시때때로 전화를 해서 폭언을 내뱉는 학부모도 없었다. 교장선생님이 찾아와 내게 고함을 치며 인격모독을 하지도 않았다. 

 

어느 교실이든 있을 수 있는 작은 사건들이 쌓인 것뿐이었다.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더 애썼다. 행여 큰 사고가 벌어질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보내면 수업준비와 업무에 몰두하며 달렸다. 집에 돌아가도 식사 잘 챙겨 먹고, 운동하고, 일기를 쓰고, 때론 명상 유튜브를 보면서 내 에너지를 잘 유지해야 한다며 나를 다그쳤다. 일상에서도 잘 있어야 교실에서 더 힘 있게 서 있지,라는 강박.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무사히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은 스크래치들은 더 부지런하게 내 마음 곳곳에 쌓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긴장으로 몸에 힘이 빠짝 들어갔다.


따지고 보면 사소했다. 아침에 오자마자 시간표에 붙여진 국어, 수학, 사회 등 주지과목만 보면 크게 한숨 쉬는 아이들(일부라 해도), 전날 수업시간에 하려고 열심히 준비했던 활동에 그게 무엇이든 설명도 듣지 않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 쉬는 시간 복도너머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씨발씨발, 아, 또 국어야. 재미없어. 이런 작은 말들. 그때마다 지도하고 사과받기도 했고, 때로는 지쳐서 흐린 눈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6학년인데 심드렁할 수 있지. 지금 쟤도 힘드니까 그럴 수 있지. 측은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온 적이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애써 누르며 나는 괜찮은 척했다. 


작년 2학기, 학생들에게 교원 평가에 관해 안내하고 있었다. 

“교권 나락 갔다던데.”

내 설명이 끝나자, 한 아이가 말했다. 순간 교실은 조용해졌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되묻고 그 말이 퍼지지 않도록 별일 아니라는 듯 애써 돌아섰다. 하지만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마음속으로 아이가 했던 그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나 역시 현장의 이런 분위기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 같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만 보였다. 교실 안에 아이들도 무언가에 지치고 눌려있었다. 중학교 3학년을 넘어서 고등학교 수학까지 선행을 하고, 쉬는 시간에도 영어단어를 외우며 학원 숙제를 하는 아이들. 자극적인 영상을 접하는 시기는 점점 빨라지고, 주의집중이 점점 힘들어진 아이들. 교실 밖을 넘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사고가 나서 민원이 생기면 안 되니까. 우리 반만 괜한 유난 떨면 안 되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만 내 다리를 잡고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작년 말, 나는 연극치료 선생님께 오랜만에 문자를 보냈다.     

“내려놓는 것도, 그렇다고 힘 있게 이끄는 것도 갑자기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 할 수 없는 것 / 할 수 있는 것 / 그리고 내가 해낸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압도가 되었다. 내가 한 해 농사를 잘못 지은 게 아닌가란 자책으로 넘어갔다. 도대체 무엇이 쌓였길래 지쳤을까? 내가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말과 행동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인정했다. ‘나는 관대하지 않다. 작은 말들에 상처받고 뒤끝도 길~다.’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전에 ‘내가 해낸 것들’을 하나씩 적었다. 

수업공부모임에서 교실에서 했던 토론 수업을 시연한 것, 아이들과 함께 했던 매 시간의 수업과 활동들, 여자 아이들의 미묘한 관계를 지도하며 함께한 온책 읽기, 도벽이 있던 학생을 지도했던 경험, 교실에서 일어났던 사고들을 수습했던 것, 그래도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애쓰고 배려했던 말과 행동들…. 

그랬다. 그동안 아이들과 서로 즐겁고 빛나던 순간들도 많았다. (문제 행동을 아무리 지도해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도 했지만) 지도하는 순간만은 짧지만 이해하고 수긍했다. 교실 안에서 내가 나누고 싶은 가치(시도, 감사, 긍정, 존중 등)들을 가르칠 수도 있었고, 하고 싶은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그렇게 정말 사소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분명 있었다.  


갑자기 휴학했던 대학원이 생각났다. 내년에 복학하지 않으면 자퇴처리가 될 터였다. 열심히 공부를 해 입학했지만 첫 학기 4월이 되기도 전에 휴학을 했던 곳이었다. 대학원이 기대했던 모습과 달라서, 내게 이런 단호한 면이 있었나 싶게 칼같이 멈추었다. 왜 다시 돌아갈까 고민을 했을까? 휴직하고 공부를 하고 싶었나? 그러다 내가 쉬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에게 나의 고민을 꺼냈다. 휴직하면 뭐 하고 싶어? 란 동생의 물음에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말했다. 


“언니, 지금 말할 때 눈이 반짝여. 휴직해.” 그렇게 나는 휴직계를 제출했다. 

돌이켜보면 휴직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해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버텼다. 어떻게든 이 직업에 적응하려고 수많은 연수를 들었고,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고, 연극치료를 받기도 했다. 당시는 휴직을 생각하지 않았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경험을 더 쌓아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동생의 물음에 글을 쓰고 싶어, 연극도 하고 싶어. 라며 하고 싶은 것들을 술술 쏟아내는 나 자신이 새삼스러웠다. 쉬고 돌아온다 해도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게 충분한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그 해 가뭄이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생각보다 잘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땅도 쉬어가게 하지요.” 내 이야기를 듣던 연극치료 선생님이 말했다. 맞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어쩌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던 내 모습을, 내가 해냈던 것들을 더 많이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농사를 내가 나서서 비하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4. 교사인 나 자연인 나     


다시 내 눈앞에 놓인 ‘교사인 나’와 ‘자연인 나’를 바라본다.

교실 안에서 마음껏 내려놓지도 그렇다고 힘을 꽉 주지도 못한 채 흔들리던 모습. 교실 밖의 폭풍우 같은 현실 앞에 자꾸 주저앉는 모습. 하루에도 많은 사건이 쏟아지는 학교에서 나도 아이들도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방패가 사라진 자유로운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두렵기도 했다. 혹여나 실수하면 어떡하지,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 란 생각으로 내가 생각한 ‘교사의 가면’을 썼다. 하지만 내 마음을 억누르고, 애써 미소 짓고, 괜찮은 척했던 방패는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조금 내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실수도 많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인 내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려고 했다. 그렇게 교실 안에서 좀 더 편안하게 서 있으려고 했다. 물론 연극 치료 선생님을 만난 후에도 교실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사태를 진압할 때는 방패와 갑옷으로 아이들과 나를 지켰다. 가끔은 내 감정을 보여주고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렇게 아이들과 나는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졸업까지 나아갔다.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곧장 글쓰기 교실에 등록했다. 한해 쉬면서 나를 돌아보고 몸도 회복하고 글도 쓰고 싶었다. 지금까지 교직에 있으며 나를 발견하며 성장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학교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 교실보다 일상의 이야기를 더 쓰고 있다. 잊어버린 게 반가웠다. 


뜨겁고 비가 유독 많이 왔던 올여름, 나도 한 마음으로 아스팔트 위에 있었다. 일터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잠시 벗어난 사람으로 부채감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보려 한다. 


문득 ‘교사인 나’와 ‘자연인 나’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을 ‘교사’와 ‘자연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처럼 on/off가 되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거지. 칼로 잘라 어느 하나 겹친 곳 없이  딱 둘로 가를 수도 없을 것이다. 가르치는 나, 공부하는 나, 글을 쓰는 나, 연극 배역을 맡은 나, 수다를 떠는 나, 운동하는 나, 요리하는 나…. 수많은 내 모습들이 내 안에 함께 있다.

      

이제 편안한 얼굴로 온전하게 서 있는 ‘교사인 나’. 그리고 그 손을 마주 잡은 언제든 날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자연인 나’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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