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빛나던 여름밤'들

2019년 여름, 전국 교사 연극 연수

by 강은

이제 내 차례였다. 어두운 무대 위에 자리를 잡고 섰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지팡이를 잡은 듯 한쪽 손을 움켜쥐었다. 나를 향해 핀 조명이 켜졌다. 조명 뽕도 받았겠다, 심장은 더 떨려왔다. 정적을 깨고 입을 뗐다. “영감~ 그곳에선 잘 있쟤?” 숱하게 반복했던 첫 대사였다. 실수할 걱정보다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내게 주어진 ‘할머니’ 역할로 그 순간 무대 위에서 빛나고 싶었다.




2019년 여름, ‘교사 연극 연수’에 참여했다. 방학 동안 지방의 대학교 건물을 빌려서 합숙하고, 마지막 밤인 금요일에는 팀별로 연극 한 편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 동화, 시, 희극, 옛이야기, 우리 이야기 중 원하는 팀에 신청받았다. 나는 ‘우리 이야기’ 팀에 들어갔다.


‘우리 이야기’ 팀에는 리더 역할을 해주시는 3분, 나를 포함한 참여자 12명, 이렇게 총 15명의 교사가 모였다.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각자 듣고 싶은 닉네임을 정했다. 5박 6일 동안 그곳에서 나는 내 이름 대신 ‘작은 자유’로 불렸다.


‘우리 이야기’는 참여자들의 이야기로 연극을 만드는 팀이다. 그래서 초반에 각자의 사연을 꺼내놓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교사로서 학교에서 받았던 상처, 가족 간의 갈등, 우울증으로 아팠던 이야기…. 한 명이 용기를 내서 물꼬를 트자, 하나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물을 닦아주며 우리 팀은 점차 가까워졌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할지 말지 망설였다. 당시 나를 붙잡았던 건 몇 년 전의 사고와 그 뒤에 이어졌던 수술이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음 한편에 사람들 앞에서 그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으니까. ‘연수에서 말하라고 판을 깔아준 거 아닌가? 나누고 나면 가벼워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떼려다가도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내 문제가 너무 부담스러울 거야.’라는 생각에 입을 닫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내 목소리는 밖으로 나가길 주저하면서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이곳은 심리치료가 아니라 일주일 동안 연극을 만드는 곳이에요.” 어느 날 리더 한 분이 모두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고 안도했다. 솔직하게 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겁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가 망설인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랬다, 나는 연극을 만들러 왔다. 그제야 내 마음과 몸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눈치 보지 않고 춤도 추었다. 편해진 팀원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우리는 각자가 펼쳐낸 사연을 엮고 조합하여 연극을 준비했다. 배역은 공연 전날이 되어서야 정해졌다. 팀원들이 내 연기를 보더니 잘한다고 칭찬했다. ‘어랏, 나도 몰랐던 숨겨진 재능을 이렇게 발견하는 것인가?’ 고마우면서도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기쁜 입꼬리를 애써 숨겼다. 연습이 거듭될수록 무대 위에서도 돋보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한 여름밤의 무대는 단 한 번만 상연한다. 그 위에서 우리 모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었다. 연극이 끝나고서야 긴장이 풀렸다. 뒤풀이에서 소감을 나누고 나서야 연기했던 ‘할머니’를 보내주었다. 후련했지만 뒤이은 아쉬움이 더 크게 밀려왔다. 돋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무대를 즐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 다시 올라간다면, 다른 배역들과 관객들과도 더 어우러지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주목받고 싶었던 마음을 따라 내가 끝까지 가봤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에는 리플레이가 없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지만, 팀원들의 반응에 들떴고, 진심 어린 응원에 고마웠던 순간들은 선명하게 남았다.


5박 6일 연수라는 무대에서도 나는 ‘작은 자유’라는 배역으로 살았다. 내가 어떤 교사였는지, 내게 벌어졌던 사고며, 중환자실에서 느꼈던 공포가 무엇이었는지 잊고 싶었고, 어느 순간부터 잊을 수 있었다. 끝내 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끈끈해진 15명의 동료를 얻었다.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삶을 살아 봤던 ‘빛나던 여름밤’들을 간직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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