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졸업 전시와 취직을 함께 고민하던 대학 동기들이 어느덧 모두 5~6년차 디자이너가 되었다. 어수룩하던 사회초년생 시기를 지나면서 이제는 직장 생활도 꽤 익숙해졌는데 어째서인지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미대 입시를 3년, 대학 공부를 5년 하고 나서 디자이너로 일한지 이제 겨우 6년차인데 벌써 마음이 불안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디자인을 잘하는 후배는 너무 많은데 15년, 20년 일하는 선배는 별로 없다. 우리는 과연 40대가 되어서도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을까.
BX디자이너는 왜 이렇게 안 뽑아?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사업 기획을 구체화하는 초기 단계부터 꼭 필요하다.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제품의 성격과 톤앤매너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사실상 BX디자인을 겸임한다. 프로덕트를 런칭하고 운영하면서 어느 정도 시장성이 검증된 다음에야 브랜드를 뾰족하게 만들 'BX디자이너'가 필요해진다. 콘텐츠 디자이너도 수요가 많다. 마케팅 관련 디자인에는 보통 속도와 물량 공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BX디자이너 채용공고여도 자세히 읽어보면 마케팅/콘텐츠 디자인 업무만 써놓은 경우도 많다.
물론 어떤 타이틀로 입사하든 실제로 그 회사에서 어떤 역할까지 할 수 있을지는 본인 성과에 달렸다. BX디자이너는 브랜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시각적 요소를 포함한 모든 터치포인트에 관여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디자인은 지원 부서이고 제작 업무 파이프라인에서도 끄트머리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나 의사결정권한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제 역할을 잘 해내려면 정보 수집과 상황 판단이 빨라야 하고,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뛰어나야 하고, 무엇보다 멘탈이 튼튼해야 한다.
나는 꽤 오랫동안 정체성 혼란을 비롯한 여러가지 의문에 시달렸다. 만드는 일보다 기획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내가 디자이너가 맞나? 이미 디케터(디자이너+마케터)에 가까우니 아예 마케팅 쪽으로 더 가야 하나? 브랜드 기획에서는 어디까지가 마케터의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BX디자이너의 영역일까? BX디자이너는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은데, 직무 전환을 하는 게 나을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저 이 회사에 도움이 되고,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진행한다.
종족은 디자이너고요, 브랜드 만드는 일을 합니다.
누군가가 관리하지 않을 때에도 브랜드는 조금씩 쌓인다. 운영 주체의 사고방식과 취향에 따라 특정한 액션과 스타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쌓여 있던 조개무지 속에서 핵심가치를 찾아내고, 거기에 브랜드 경험의 결을 맞춰가는 게 BX디자이너의 일이다. 상품이나 서비스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 브랜드를 좋아하는 초기 사용자 집단이 생긴다. 그들은 이 브랜드가 자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초기 사용자들과의 관계성을 관찰하면 브랜드를 선명하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내가 가려는 회사가 BX디자이너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인지 궁금하다면 두 가지를 확인하자. 먼저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고려했을 때 브랜딩에 힘을 실을 필요가 있어야 한다. BX디자인으로 비즈니스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결국 공허한 장식에 그칠 뿐이다. 또 경영진이 생각하는 브랜딩은 무엇이고 디자이너를 어떤 역할이라고 생각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CEO가 전혀 관심이 없거나 회사 운영 철학부터 갈팡질팡한다면 BX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브랜드 철학의 기반인 비전, 미션, 비즈니스 방향성은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CEO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