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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숲 Jul 27. 2021

여행은 도끼다

나의 첫 해외여행 이야기 3화


         

           


친구와 나는 드디어 호핑투어장에 도착했다. 어느덧 출발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조그마한 보트 같은 걸 타고 큰 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필리핀의 8월이었다. 선크림을 얼굴에 잔뜩 도배하지 않으면 피부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보트 밑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니 영화에서만 보던 아주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졌다. 그냥 에메랄드라고 하기엔 묘사가 부족한 것 같다. 파란색과 초록색 사이에 있는 수많은 스펙트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속을 헤엄치는 다채로운 물고기들이 바다의 색깔을 단정 짓기 더 어렵게 만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바다였다. 정말.     



곧 우리는 큰 배로 갈아타고 스노클링 포인트로 향했다. 그 배는 방카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 20명 정도의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꽤나 대형 배였다. 잠시 후 방카가 어떤 지점에서 멈췄다. 투명한 물속에는 그들을 찾아서 돌아다닐 필요도 없을 만큼 수많은 니모도리가 호기심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서 헤엄치고 있었다.



필리핀 현지 가이드의 바디랭귀지를 통한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구명조끼를 입은 후 수중 마스크를 차고 바다로 곧장 뛰어들었다. 귀여운 아기 물고기들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놀고 나서 배는 무인도 같은 섬에 도착했다. 사람이 살고 있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무인도는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고 우리는 아주 큰 해상 레스토랑에서 초호화 점심을 즐겼다. 돼지고기 바비큐와 대게, 새우, 오징어, 각종 생선 등등 마치 200년 전 영국 귀족이 캠핑을 왔다면 먹었을 것만 같은 고급 해산물들이 쫘악 펼쳐져있었다. 부자가 되면 매일 이런 느낌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그 섬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시간을 배정받았다. 나와 친구는 뻥 뚫린 하늘에 뭉게뭉게 핀 구름들을 보며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섬 체험을 조금 늦게 했다.      



만족할 만한 사진을 얻고 나서야 그 섬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왼쪽 편에 1층짜리 작은 학교가 보였다. 유리가 없는 창문을 통해 수업을 힐끔 구경했다. 그러자 몇몇 아이들이 눈치를 채고 우리를 향해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곧 그 반 전체 학생들이 창문 쪽을 바라보며 '하이'를 외쳤다. 나와 친구는 쑥스럽게 손을 흔들어보았다. 순간 수업을 방해했다는 걸 깨닫고 미안한 마음에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선생님 또한 아주 해맑게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 광경이 내겐 아주 어색했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원주민들 한 두 명씩 보이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가죽만을 걸친 채 해먹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할아버지. 부러질 것 같은 평상에 누워 졸린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아주머니. 바닥에 쭈그려 앉아 우리를 초점 없이 쳐다보시는 할머니. 모든 게 낯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명이 아닌 공간에 발을 들인 것이다.      



미로 같은 작은 숲 속을 헤치며 익숙지 않은 그 분위기를 카메라가 아닌 눈에 가득 담으려 애썼다. 곧 우리는 텅 빈 해안가에 도착했다. 잘 조성된 해수욕장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해변이었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 조그마한 배 두 척이 정착된 채 일정한 속도로 둥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세계의 반대편에 나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낯섦과 날 것으로서의 자연. 그 섬이 풍기는 강한 인상은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느낌과 차마 비교할 수 없었다. 여행 동안 친구와 나는 계속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돌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아무 말도 없었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어색함’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섬의 마력에 끌려 다니듯 넋을 잃고 걸었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배 출발 10분 전이었다. 그제야 급하게 작은 정글을 치며 선착장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가는 길마다 새로웠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그곳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만 것이다. 갑자기 막연한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 낯선 섬에 이대로 남겨지면 어쩌지?’ 그 생각을 하니까 마치 심해 속에 갇힌 것처럼 정신이 아찔해졌다. 방문과 방랑까지는 좋았지만 결코 방치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뼛속까지 문명인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길은 또 다른 낯선 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어느덧 시계는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우리는 배가 출발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정말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3분, 5분, 10분이 더 지나도록 그 미로는 여전히 답을 주지 않았다.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가고 희망의 불빛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선착장이 보였다. 아직 배가 있었다. 우리는 남은 힘을 모두 다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현지 가이드가 그런 우리를 보며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여행 첫날부터 필리핀 사람들의 느릿느릿한 일처리에 대해 구시렁댔는데 내가 그로 인해 혜택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선착장 앞까지 나와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우리를 반겼다.



 그곳에서 느꼈던 묘한 분위기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흔들어놓는다. 이후로도 여행을 많이 했지만 그때만큼의 충격은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 ‘최초의 낯섦’은 ‘최초’이기에 마음속에 더욱더 깊게 새겨져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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