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가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두 콤비에 의해 2013년 즈음 원안이 만들어졌던 시나리오 한편이 있었어요. 두 사람이 대학 시절부터 떠올렸다는 '두려움을 표현하는 아주 조용한 이야기' 였다고 하죠. 이 원안에 관심을 가졌던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2017년에 이들의 스크립트를 사들였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이 시나리오는 원래 J.J. 에이브람스가 구축한 <클로버필드> 세계관으로 편입될 예정이었고 TV 시리즈 <오피스>로 유명했던 배우이자 감독 존 크래신스키가 이 각본에 공동으로 참여했어요.
최소 90에서 120페이지에 달하는 일반 영화 시나리오에 비해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60페이지 정도의 길이에 불과한 내용이었습니다. 분량으로 치면 한 시간 남짓한 TV 프로그램 정도였죠. 소리를 낼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라 대사가 거의 없거나 극히 제한적인 형태로 그려졌어요. 이 각본을 검토한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이 작품이 <클로버필드>의 하위 영화가 아니라 별개의 독립 작품으로도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라는 정식 타이틀로 2017년 하반기부터 촬영에 들어갔고 각본에 참여한 존 크래신스키가 감독과 주연까지 1인 3역을 맡았어요. 1,700만 달러의 단출한(?) 제작비로 완성된 이 90분짜리 공포영화는 2018년 3월 공개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죠. 로튼 토마토 신선지수는 무려 95%를 찍었습니다.개봉 첫 주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누르며 순식간에 제작비를 회수해버리고 거둬낸 전 세계 흥행수입은 약 3억 4천만 달러. 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순 제작비로만 본다면... 무려 20배의 수익을 뽑아낸 거였죠.
이 쏠쏠한 가성비에 크게 고무된 제작사는 속편 계획이 없었던 감독 겸 배우 존 크래신스키를 곧바로 설득했습니다. <트랜스포머>나 <미션 임파서블> 외에 변변한 시리즈 성공작들이 많지 않은 파라마운트로서는 효자 시리즈물이 될 공산이 커 보였겠죠. 존 크래신스키에게 제공한 스토리가확정되고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속편이 완성되었어요. 2020년 3월 8일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까지 진행된 상태였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본격적으로 들이닥친 코로나19 여파로 2021년 중반으로 연기된 상태였습니다.
근데 드디어 그날이 눈앞에 다가왔죠. 이제 속편 개봉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어요. 이제껏 기다려왔던 그 시간이 제겐 아깝지만은 않았습니다. 매력적인 세계관에 독특한 설정들, 게다가 여전히 계속 주연을 맡은 배우 에밀리 블런트까지. 이렇게 덕심으로 일편단심.
영화는 무언가 엄청난 일이 휩쓸고 지나간 지 한참 뒤의 상태로부터 시작됩니다. 인적 없는 황폐한 길거리, 먼지가 잔뜩 쌓인 텅 빈 슈퍼마켓에서 생필품을 찾고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이 비쳐요. 아빠, 엄마, 누나와 남동생 둘. 이런 장면 자체는 굉장히 익숙합니다. 인류가 멸망하다시피 한 세기말적 배경의 영화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설정이니까요. 한데 가만히 지켜보면 뭔가 좀 다릅니다. 단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아요.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고 눈빛과 표정, 입모양만으로 의사표현을 하고 있죠. 모두 맨발 차림이고 길을 걸을 땐 맨땅을 밟지 않고 미리 뿌려놓은 모래 위만 디뎌 소리가 나지 않게합니다. 그렇다고 길가에 좀비나 뱀파이어 같은 존재들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천재지변이나 핵전쟁이 닥친 것도 아닌 걸로 보여요. 오히려 하늘은 더 푸르고 공기도 더욱 맑아 보입니다. 평화로워 보일 정도로.
점점 호기심이 들 무렵쯤, 가족들의 맨 뒤를 따라 걸어오던 막내아들의 손에서 갑자기 로켓 장난감 소리가 삐리리리 울려 퍼집니다. 영화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소리. 뒤를 돌아본 가족들 모두가 공포에 사로잡혀요. 엄마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아빠는 미친 듯이 막내에게 달려가죠. 하지만 손써볼 새도 없이, 로켓 장난감을 들고 있던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는 순식간에 목숨을 잃습니다. 단 한마디의 대사나 흔한 배경음악 하나 없이 긴 침묵 속에 진행되던 이 작품의 오프닝은 이렇게 딱 한번 울렸던 장난감 소리와 함께 희생되는 꼬마 아이의 모습을 비추며 역시 무심하게 쓱 암전 될 뿐이었어요.
장르상 SF 공포영화나 스릴러혹은 재난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이 작품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어떤 별도의 설명 한번 없이 관객들을 이렇게 첫 시작부터 '상황'속에 곧바로 던져놓는 느낌이죠. 이런 류의 작품들이 초반부에 시간을 꽤 오래 들여 그려내는 인물 묘사나 상황 설명들이 일절 없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주고 뭔가 불길한 조짐들을 보이다가 재앙이 일어나 인류가 멸망의 지경에 이르는 전형적인 과정들을 모조리 생략해 버렸어요. 늘어지게 만드는 그런 도입부를 과감히 생략하고 그 이후 간신히 살아남은 한 가족의 시점으로 곧바로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사실 니가 제일 무서웠어
멸망한 세상 속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이 설정만으로 놓고 보면 정말 수도 없이 봐왔던 전형적인 클리셰에 불과한데,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공포의 맥락은 뭔가 종류가 다르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괴생명체보다 오히려 그것들을 불러오는 평범한 '소리'들이 작품 속에선 더 큰 공포로 그려지고 있어요. 걷고, 움직이고, 대화하고, 식사하고, 잠을 자는 일상의 모든 당연한 일들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와닿을 겁니다. 귀가 터질듯한 음향효과와 쏟아지는 대사들, 현란한 시각효과로 가득한 여타 공포영화들을 보고 있다 보면 정작 그 와중에도 팝콘을 씹으며 종종 딴생각에 빠지기도 하잖아요. 지나친 자극들이 몰아치면 오히려 무뎌지기도 하니까. 한데 이 작품은 그와 정반대로 많은 것들을 축약하고 덜어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관객들이 그들과같은 입장에서 더욱 긴장하며 빠져들게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직접적인 자극들보단 그들이 보여주는 미세한 표정과 입모양, 눈빛, 몸짓들에 더 몰입하게 만드는 거예요. 포스터와 몇몇 스틸 사진들로만 보면 전형적인 클리셰들이 작렬하는 고만고만한크리처 공포영화에 불과해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세련되고 영민한 각본과 연출, 연기가 돋보이는 흔치 않은 웰메이드 장르물이었어요. 많은 것들을 담으려 하기보단 반대로 많은 것들을 절제하고 있어서 더욱 감정선이 풍부해지는 실로 독특한 영화기도 했죠.
한데 특이하게도 보면 볼수록 이 영화는 제게, 따뜻한 '가족영화'로 보입니다. 에밀리 블런트의 저 고통스러운 얼굴 표정만 봐도 아주 그냥 수십수백 명의 팔다리가 댕강댕강 잘려 나갈 법한 끔찍한 영화로만 보이는데 그게 뭔 엉뚱한 소리냐고요. 이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이라곤 이 가족 몇 명과 딱 한 장면 등장하는 어느 노부부가 다예요. 괴생명체가 이들 중 몇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그냥 휙 스쳐지나가는 수준이라 우리가 보는 일반 케이블 드라마보다도 실은 더 '순합니다'. 결국 괴물들이 인간을 죽이는 시각적 연출 자체엔 별 관심이 없는 영화란 셈이죠.
맨 처음 이 작품을 감상했을 때, 제가 이 작품에 스르륵 빠져들기 시작했던 순간은 다섯 살 막내가 희생되는 오프닝 직후 이어지는 그다음 장면들에서부터였어요. 허망하게 어린아이를 잃고 난 후 곧바로 가족들 전체가 오열하며 무지막지한 슬픔을 쏟아낼 줄 알았었죠. 특히 엄마 아빠의 시각에서. 한데 이 작품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꽤 시간이 지난 지점으로 바로 건너뜁니다. 외딴 농가에서 이들이 척박한 삶을 이어가는 걸로 그려지는 와중에 뒤뚱뛰뚱 걷는 엄마의 배가 클로즈업되면서 그녀가 다시 임신을 했다는 걸 보여주죠.
오프닝에서부터 그렇게 이어지는 감정선이 굉장히 섬세하단 느낌이 들었어요. 그간의 시간들을 직접 보여주진 않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남달라 보이는 이 부부에게 그 막내의 죽음은 헤어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겁니다. 본의 아니게 그 빌미를 제공했던 청각장애 누나도, 비슷하게 어린 나이에 그 죽음을 목도했던 형의 충격도 물론 마찬가지였겠죠. 그 상황에서 이 부부는 다시 아이를 가진 겁니다. 작은 말소리만으로도 죽음이 닥쳐오는 이 세상 속에서 임신, 그리고 출산을 거쳐 신생아가 자라는 동안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소음들을 떠올려 본다면 이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거잖아요?
널 사랑했다
아빠는 계속, 널 사랑했어
이 영화의 재미를 인정하면서도 적잖은 관객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부의 '임신'이었다고 해요. 이런 세상 속에서, 생존을 담보하기 힘든 정말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는 거죠. 극 중에서도 양수가 터져 출산이 임박한 그 순간에 하필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는 이런 스타일의 전개가... 이 작품을 비교불가의 독특한 작품으로 만든 거라고 봐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두 주인공 부부가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목숨 걸고 키우려 하는 이유'를 넌지시 떠올려보게 만드는거죠. 과연 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그 고통스러운 순간 와중에 부부가 보이는 행보를 보면 출산이 임박했을 때 산모와 아이를 지킬 나름의 치밀한 동선과 계획을 짜두었다는 게 느껴집니다. 최소한의 방음이 되는 공간도 마련해 두었고 아기의 울음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책들도 나름 준비해두고 있었죠. 가족 각자의 행동요령들도 꾸준히 준비해둔 듯했습니다.
다만 딱 하나. 예기치 못했던 그 계단 '대못'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뿐이에요. 실제 우리의 삶들도 그렇지 않나요? 명백히 다가올 커다란 불행들은 차라리 미리 준비하고 대비해 볼 수 있지만, 우리를 항상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착오, 실수, 우연과 같은 작은것들로부터이니까요.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불행들이 언제 어느 때 닥치더라도 우리의 인생이 스스로 멈춰질 이유는 없듯이 영화 속 이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로만 따진다면 이런 세상 속에서 이렇게 가족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거 자체가 무의미할 테죠. 책임도, 의무도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은... 그냥 남편이고 아내고 생존에 하등 도움 안 되는 꼬맹이들 다 버리고 혼자 묵언 수행하며 몸 챙겨 살면 되는 거니까.'임신'을 하는 게 바보같은 짓이었다면, 이렇게 근근이 모여 사는 것도 바보같은 짓일 뿐입니다. 숨 죽이며 함께 했던 모노폴리 게임도 멍청한 짓이고 이 와중에 엄마가 아들에게 매일 손짓으로 가르쳐주는 학교 공부는 그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짓일 거예요. 누군가 이 영화 속 세계관에서 어딘가 또 살아남아 있다면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죠.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걸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한데 이 가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서의 삶, 인간으로서의 삶을 계속 선택한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들여다보자면 이 작품에서의 '임신'과 '출산'은 옥에 티가 아니라 오히려 이 특별한 시나리오를 떠올렸던 이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부각하고 싶었던 부분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 설정이 빠졌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제겐 이 작품은 그냥 평범한 크리처 영화일 뿐이에요. 아빠의 마지막 그 모습도 그저 전형적으로만 보였겠죠.
속편 개봉을 이제 코 앞에 둔 시점에서, 따스한 '가족영화'의 관점으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차분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괴물'이란 존재 자체는... 그저 거들 뿐이거든요. 기획, 공동각본, 감독, 주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수많은 흔적들을 작품 속에 녹아 냈을 존 크래신스키는 1편 개봉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죠.
"이 영화는 저의 두 딸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와 같습니다."
솔직히 그 당시엔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 생각이 다르죠. 작품에 대한 그의 소회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말이에요, 그 사랑의 수많은 빛깔만큼이나 때론 다채로울 수도 있을 테니까요. 크리쳐 영화에 불과해 보였던 바로 이 작품에서 그렇게 느껴졌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