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을 보는 소년의 이야기 <식스센스: The Sixth Sense>가 6억 7천만 달러의 초대박을 쳤던 1999년. 바로 이듬해 2000년 11월에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새 작품이 공개되었습니다. 제목은 <언브레이커블: Unbreakable). 개봉 초기엔 별 흥미를 끌지 못했던 <식스센스>와는 달리 이 작품은 개봉 전부터 엄청난 관심을 끌었죠. <식스센스> 감독의 신작이란 홍보문구가 계속 강조되었습니다. 엄청난 반전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식스센스>의 후광을 노린 그 마케팅은 꽤 성공적이었어요. 많은 관객들이 큰 기대 속에 <언브레이커블>의 개봉관을 찾았습니다.
영화는 두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져요. 데이빗 던(브루스 윌리스)과 엘리야 프라이스(사무엘 L. 잭슨).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데이빗은 극 초반부 대형 열차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130명 넘게 모두 사망한 그 사고에서 찰과상 하나 없이 혼자 살아남았어요. 그 일이 있은 후 엘리야 프라이스라는 코믹스 화가가 그에게 접근해오죠. 그는 절대 다치지 않는 데이빗 던과 정반대의 인물이에요. 뼈가 기형적으로 약한 '선천성 골형성 부전증'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작은 충격에도 뼈가 쉽게 부러져 평생 54번의 골절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든 사람이죠. 극명히 대비되는 이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정체성을 두고 내내 고민하는 이야기였어요. 엘리야는 데이빗에게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걸 일깨워주려 합니다. 데이빗은 평생 자신이 아프거나 다쳐본 적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특별한 존재란 걸 여간해선 인정하지 않죠.
영화는 이 지루한 '논쟁'을느린 호흡으로 가져갑니다. 초반부 열차 사고 장면은 얼렁뚱땅 뉴스 화면 하나로 휙 퉁쳐 버려요. 제대로 된 액션 장면도 없죠. '부러지지 않는' 육체를 가진 데이빗 던이 각성 후 보여주는 활약상이 몇 있지만 흔히 봐 온 초능력 영화들의 연출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요. 엄청난 음모를 꾸미는듯한 엘리야는 계단에서 엎어져 복합 골절된 후 내내 입으로만 '때웁니다'. 이제 뭔가 재미있어지려는 건가 싶을 때 영화가 툭, 끝이 나요. '나쁜 짓 하던 엘리야는 감옥에 갔습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 극장 불이 켜지고 이게 뭔가 하고 멀뚱멀뚱했던 기억이 나요. <식스센스>의 재미와 충격을 기대했던 당시 관객들에겐 <언브레이커블>의 이 생뚱맞음이 그 자체로 반전과 충격이었습니다. 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 영화인지 가늠하기 힘들었죠. 그렇게 쉽게 잊혔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지금 니거 보는 나는, 어떤 나일까
고통이 그를 깨운다
이후 내놓는 작품마다 쓴맛을 보던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2016년, <스플릿: Split>이라는 신작 한편을 공개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선 <23아이덴티티>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었죠. 감독이 참 오랜 세월 꾸준히도 찍어오던 심리 스릴러 장르. 영화는 극 초반부터 여학생 세명을 납치해 감금하는 범죄자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의 얼굴과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죠. 그가 23개의 분열된 인격을 가진 인물이란 사실도 쉽게 내보입니다. 제한된 공간, 제한된 인물들로 그려지는 이 밀실 스릴러에서 감독은 서서히 서스펜스를 조여가는 자신의 장기를 오랜만에 맘껏 발휘했어요. 달라지는 인격에 따라 순식간에 눈빛부터 목소리, 몸짓까지 바꿔대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기막힌 연기도 일품이었죠. 극 전체를 멱살잡고 가는듯한 그 명품 연기와 더불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통해 현 상황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감정적으로 교차하게 되는 그 독특한 서사 또한 꽤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론 900만 달러의 저예산급 제작비 대비 전 세계 2억 7천만 달러, 무려 30배의 흥행수입을 거둔 작품이 되었어요. '예전만 못하다', 심지어는 '식스센스가 실수였냐'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던 감독에겐 모처럼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도 했죠.
한데, 결말이 뭔가 의아해요.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인해 23+1개의 인격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이 심리 스릴러 작품이... 느닷없이 초자연적 영역으로 마무리되어 버립니다. 현실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그 생뚱맞은 결말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쯤, 문제의 쿠키 장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요. 전 세계 영화 마니아들, 특히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팬들에겐 환호성이 튀어나올 만큼 역사적인 쿠키 장면 하나가 아무 사전 정보 하나 없이 이 작품 <23아이덴티티>의 말미에 깜짝 등장했던 거죠. 그게 뭐였냐고요? 오랜 세월이 지나 한참 나이 든 모습의 브루스 윌리스가 데이빗 던의 모습으로 등장해 엘리야 프라이스에 대한 대사를 읊조리는 겁니다.
16년 전 영화 <언브레이커블>, 대체 뭔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알쏭달쏭했던 오래전 그 작품 속 두 초능력자들이 이 작품 <23아이덴티티>에 느닷없이 다시 나타난 거였죠. 그 쿠키 장면 하나로 순식간에 두 작품의 세계관과 설정이 긴 세월을 뛰어넘어 하나로 연결되었어요. 뭔가 하려다 만 얘기 같았던 <언브레이커블>의 서사도 그대로 이어졌고. 이 작품 <23아이덴티티>의 새로운 인물 케빈으로 인해 함께 어우러질 이야기는 더 무궁무진해진 겁니다. 그리고 곧바로 들려왔던 기쁜 소식. <언브레이커블>과 <23 아이덴티티>를 이어 이 시리즈를 완결 짓는 세 번째 작품 <글래스: Glass>가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었죠. 브루스 윌리스, 사무엘 L. 잭슨, 제임스 맥어보이가 모두 합류한 마지막 작품 <글래스>는 순조롭게 촬영을 끝내고 2019년 겨울,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무려 20여 년이 지나서야 말이에요.
고통으로 빚어진 야수와
'부서지지 않는' 육체
그리고, '부서지지 않는' 정신
인터뷰에 따르면 감독은 처음 <언브레이커블>을 만들 당시부터 이미 히어로 3부작을 염두에 두었다고 해요. 한데 바로 그 첫 작품 <언브레이커블>의 흥행이 참 애매했죠. 결과적으로 손실을 보진 않았지만 사실 그건 전작 <식스센스>를 본 관객들의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자체에 대한 당시 평가는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대체로 회의적이고 냉담했어요. 남다른 초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장르의 구분 자체가 애매모호했던 거죠. 영화의 스타일 자체가 낯설고 생경했던 겁니다. 결과적으로 기획 자체가 무산되었는데 16년 뒤 만들어진 두 번째 작품 <23아이덴티티>가 초대박을 치는 바람에 마지막 작품 <글래스>도 마침내 빛을 보게 된 셈이에요. 동시에 오랜 팬들의 입장에선 미완성으로 남겨진 듯했던 그 작품 <언브레이커블> 세계관의 마무리를 무려 20여 년 만에 목도하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은 거죠.
다시 봤던 것도 이미 10여 년 전이라 마지막 작품 <글래스>를 보기 전에 이전작 <언브레이커블>과 <23아이덴티티>를 연이어 복습했었습니다. 그리고 <글래스>를 감상했었어요. 꽤 기대했습니다만... 아쉽게도 절반의 성공, 그리고 절반의 실패로 느껴졌어요. 19년 전 주인공 데이빗 던(브루스 윌리스)과 엘리야 프라이스(사무엘 L. 잭슨)의 후일담만으로도 꽤 감개무량하긴 합니다. 당시 주조연들이 세월의 흐름 그대로 똑같은 역할로 등장하고, 그땐 삽입되지 못했던 편집 장면들이 지금의 회상씬들로 그려지는 것만으로도 서사가 더 두터워지는 느낌이죠. 오랜 시간 기다려 온 팬들에 대한 헌정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익히 봐온 히어로 영화들을 벗어나는 여러 설정들과 장치들도 그대로 이어져요.
한데 감독이 의도한 그 결말까지의 과정들이 지나치게 늘어지고 살짝 뭉뚱그려지는 느낌들도 있어요. 물론 귀신, 외계인, 초자연적 현상들이 등장하는 스릴러 장르를 다루면서도 오히려 정적인 드라마에 굉장히 치중하는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좋아하는 팬들도 많긴 하죠. 그 취향에 따라 이 3부작 시리즈 전체, 특히 결말이라 할 수 있는 <글래스>에 대한 호불호가 좀 갈리는 편입니다. 특히 이전작들인 <언브레이커블>이나 <23아이덴티티> 어느 쪽에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더 고역일 수 있어요. 따지자면 히어로와 빌런이 등장하는 영화지만 마블이나 DC영화들과 같은 현란한 CG나 특수효과는 기대하면 안 됩니다. 큰 줄기만 놓고 보자면 초반부에 이미 세 캐릭터 모두 쉽사리 정신병원에 갇히고, 소소하게 투닥거리다 지지리도 허무하게 '종결'되죠. 물로 그 모든 과정들이 엔딩의 잇따른 '반전'들을 위한 큰 포석이긴 합니다만 팬의 입장인 제 눈에도 반반의 감정이 엇갈립니다. 역시 M. 나이트 샤말란 , 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아쉬운 연출상의 아쉬움들이 다소 남겨지더란 말이죠.
눈을 뜨게 된 히어로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라기보단
슈퍼 빌런의 탄생기
한데 막상 이 완결편 <글래스>에서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복습을 위해 오랜만에 다시 감상했던 첫 작품 <언브레이커블>에 대한 감흥이 오히려 더 새삼스럽습니다. 20년 전 개봉 땐 솔직히 좀 '이상한' 영화로만 보였고 그 10년 뒤 다시 감상할 때도 그다지 달라진 느낌이 없었거든요. 그땐 대체 제가 뭘 본 건가 싶어요. 따지고 보면 영화 자체가 달라진 건 당연히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저의 관점이 달라진 것일 테고 영화계 전반의 분위기, 특히 히어로 영화에 대한 시각 자체가 그 당시완 굉장히 달라져 있기 때문일 거예요.
지금에서야 '아, 이 작품이 실은 슈퍼 히어로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담은 영화였구나'라고 평가되고 있지만 그땐 히어로 영화에 대한 시각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때였어요. <슈퍼맨>이나 <배트맨>등 이전 시리즈들 속 히어로들에게 '정체성' 고민 따윈 필요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팝콘무비였죠.(팀 버튼의 배트맨을 제외한대도) 그나마 흥행 실패로 인해 그 후속작들도 끊긴 상태였고, 호평을 받기 시작했던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엑스맨 시리즈조차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아이언맨> 역시 이때로부터 8년이 지나 뒤에야 나와서 MCU의 첫발을 내디딘 셈이었으니... 실상 이 <언브레이커블>을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던 거죠. 게다가 그 전통적 히어로 세계관마저도 비틀어버린 영화였거든요. 작품 속 히어로 데이빗 던과 엘리야 프라이스에게 멋들어진 태생 신화나 눈부신 각성 따윈 없습니다. 쫄쫄이 옷을 입지도 않고, 멋진 건물에 한데 모여 단체를 결성해 지구를 구하는 모습들도 아니죠. 특별함을 드러내기보단 마치 '질병'처럼 숨기고 억누르며 혼란스러워해요. 심지어는 내내 스스로 헷갈려하죠. 뭔가 자신들이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존재는 아닐까 하고.
그러니 지켜보는 관객들은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이야 마블과 DC로 양분되는 막강한 히어로 세계관이 구축되었으니 자연스레 이런 재해석들이 함께 매칭이 되죠. '어벤저스'와 '저스티스 리그' 영역 내의 전형적인 히어로 무비들뿐 아니라 <데드풀>, <로건>, <크로니클>, <브라이트 번>, <수어사이드 스쿼드>, <조커>와 같은 새로운 관점에서의 히어로 영화들이 제각각 그 색깔을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한데 20년 전 <언브레이커블>은 시대를 앞서서 채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던 정통적 히어로 세계관을 비틀어 보여줬던 겁니다. 근데 앞서도 너무 앞섰던 거였죠. 낯설고, 어색했었던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이들에 의해 재발견 혹은 재평가되었고 이젠 심지어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에게 있어 <식스센스>를 능가하는 대표작으로 손꼽혀지기도 해요. 남루한 현실에 파묻힌 특별한 존재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가는 지극히 차갑고 현실적인 히어로 영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젠 꽤 남다릅니다. 이후에 만들어진 <23아이덴티티>와 함께 묶어서 들여다보면 단순히 '특별한 능력'만을 보여주려는 영화들이 아니란 걸 새삼 깨닫게 되죠. 남모르는 고통, 학대와 차별, 억압과 깨우침이라는 관점에서 그려진 참 이색적인 슈퍼 히어로 시리즈였던 겁니다. 모두가 좋아할 순 없지만 취향 맞는 이에겐 아끼며 찾아 먹는... 그런 '홍어삼합' 같은 작품들인 거예요.
결국 제 얘기는 항상 도돌이표. 반만 만족스러웠던 완결편 <글래스>를 다시 떠올려보니 이거 딱 표현 그대로 '정신승리' 스토리로군요. 온몸이 유리처럼 약해서 평생 골절상을 입으며 휠체어 신세를 졌던 '미스터 글래스', 엘리야 프라이스가 평생 품었던 질문에 답을 얻는 이야기인 거죠. 그가 이 세상에 그렇게 태어난 이유에 관해서. 말하자면 영웅의 탄생기를 넘어서서 그 모두를 아우르는 슈퍼 빌런의 기나긴 탄생기였던 겁니다. 그래서 시리즈 3부작의 이 완결편 제목이 다름아닌 <글래스>로 지어진 거란 새삼스러운 발견. 약하디 약한 유리가 무서운 건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부서지고 나서 더 무수히 생겨나는 날카로운 단면들 때문인 거죠. 이 시리즈의 찐주인공 엘리야 프라이스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