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프 Mar 11. 2021

어머니는 be동사가 싫다고 하셨어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유 이즈 어 스튜던트.  히 어 티처."


"아뇨, 어머니.  you는 are, 그리고 he는 is.  인칭 대명사 뒤에 오는 be동사는 한 몸처럼 외우셔야 돼요.  이건 무조건  약속이라."


"be동사가 뭐고?"


"음... 정확한 특정 행동을 말하는 게 일반동사.  그리고 우리말로 ~이다,라고 완성시켜주는 동사가 be동사라고 생각하심 됩니다.   주어가 누구인지 뒤에 말해주는 명사나, 혹은 상태가 어떤지 말해주는 형용사가 올 때 써요.  일단 인칭대명사 하고 be동사는 한 단어처럼 통째로 외우세요."


  어머니의 엷은 한숨소리가 들려요.  돋보기 안경을 쓰시고 회화책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시는 얼굴이 좀 붉게 상기된 듯했습니다.  오늘로서 영어회화 두 번째 시간.  기초회화에 유용한 기본 문장 구조에 대해 설명을 드렸던 첫 번째 수업보다 이 시간을 더 힘들어하시네요.  아주 살짝, 자식인 제게 좀 민망해하신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지난주 첫 시간에도 느꼈지만 잘하실까, 계속 해내실까라는 생각이 슬쩍 스쳤죠.  저도 좀 피곤함이 들었습니다.  


  서로 겸연쩍은 미소를 주고받으며 90분가량의 수업을 마쳤어요.  괜찮으시다고, 누구나 처음에 다른 나라 언어를 접할 땐 그런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고 일주일간 하셔야 할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인칭 대명사 전부 다 외우기, 그리고 각각의 be동사까지 묶어서 통째로 외우기.  대답 없이 어머니가 살짝 고개만 끄덕이셨죠.  잠시 어색한 대화들을 주고받곤 또다시 냉장고에서 미리 준비해둔 음식들을 바리바리 꺼내 주십니다.  이거 가져가서 애기들 데워 먹여라.  아니 어머니 됐다니까요.  올 때마다 이렇게 주시면 뭐 드시려고.  괘안타 가져가라.  언제나의 그 대화 패턴이죠.  영어 가르쳐주느라 고생했다고 손 흔드시는 어머니에게 목례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갑니다.  유독 힘들어하시던 얼굴이 계속 떠올라요.  이제 시작인데.  안 버거울 실까.  이제 막 시작인 건데...       


       






 

   칠순이 되신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지난 30여 년 동안 한복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인건비 주고 사람을 쓸 형편까진 되진 못해서 옷감을 떼러 다니시고, 제작을 하고, 가게를 운영하며 각종 단체에 나가 직접 영업을 하시는 모든 과정들을 혼자서 도맡으셨어요.  이리저리 몸이 편찮으셔도, 병원 가는 시간이 아깝다며 고집을 피우셔서 저와 종종 실랑이를 벌이곤 할 정도셨죠.  


  그 와중에 틈틈이 글을 쓰셨습니다.  시 쓰시는 걸 좋아하셔서 계속 습작을 하시다가 지역 문인협회에 '시인'으로 등단을 하신지는 벌써 십오년 정도가 되어 가요.  종종 댁이나 한복가게를 찾아가면 벽면 가득히 한복 도안들과 습작시들이 붙여져 있는 모습들이 그저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대체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서 저런 에너지들이 뿜어져 나오실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때론 밤낮없이 한복을 짓고,  틈틈이 시를 쓰시다 끙끙 앓아 누우시기도 하셨지만... 당신은 늘 그렇게 행복해하셨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동안은 늘 그렇게 지내시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죠.




       

어머니가 만드셨던 한복들입니다






  한데 지금은 한복가게를 접으셨습니다.  일 년쯤 되셨군요.  혼자서 모든 걸 도맡아 하시다 보니 차츰 힘에 부친다는 걸 느끼셨거든요.  염가로 대량 제작되는 한복들이 점점 늘어나다 보니 오랫동안 단골 고객들 위주로 맞춤 주문에 주력해오신 어머니의 사업에도 눈에 띄는 변화들이 보였습니다.  때마침 코로나 시국으로 한복이 필요한 많은 행사나 모임들이 사라져 버린 상황 변화도 큰 이유 중 하나였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코로나로 인한 불황이 시작되기 이전에 가게 정리가 순탄하게 마무리되어서... 가장 큰 부담이었던 임대료 걱정을 덜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일 자체를 그만 두신 건 아니었거든요.  여전히 사업자죠.  다만 모든 도구들을 다 집에 두고, 찾아오시는 오랜 단골들 위주로 맞춤 제작만을 하고 계세요.  모처럼 푹 쉬시면서 체력을 보충하시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소용없습니다.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으시다고.


  일 년 넘게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사실 매출은 반의 반 토막도 되지 않아 보입니다만, 사실 어머니는 지난  한해 더 '바쁘셨습니다'.  한복가게에 매달리신다고 그동안 못 하셨던 다른 일들을 열심히 배우고 계시거든요.  먼저 컴퓨터 학원에 몇 달 동안 혼자 다니시더니 예전엔 전혀 손대지 못하셨던 컴퓨터를 이젠 능숙하게 다루세요.  기본적인 PC활용은 물론이고 워드 작성, 인터넷 사용까지 능숙해지시면서부턴 마치 습자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새로운 분야들에 더욱 관심을 보이시는 겁니다.  오랜 세월 모아둔 많은 한복 사진들과 자료들, 그리고 계속 쓰신 자작시들을 모으기 위해 SNS를 개설하신지는 이미 몇 달이 되었어요.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제게 넌지시 말씀을 하십니다.  늘 영어를 배우고 싶었다고.  막상 시작하려니 낯설고 두려운데 어떻게 하면 시작해볼 수 있겠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했었습니다.  저와 어머니의 영어 회화 수업.  물론 제가 그런 수업을 할 수 있을 만큼 회화가 뛰어나진 못해요.  실은 허접하죠.  생각해보니 아직 알파벳도 익숙지 않으신 상황이신데, 젊은 사람들이 가득한 학원에서 행여나 자신감을 잃으실까 봐 아주 기초적인 재미를 먼저 들이시게 할 요량이었습니다.  시험이나 공부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익혀간다는 재미를 먼저 맛보시게 한 다음 학원이나 인강의 방법들을 알려 드리고 싶었죠.  어머니의 의욕도 물론 대단하셨습니다.  

회사가 일찍 끝나는 날, 마치고 댁으로 가 저녁을 함께 먹고 첫 수업을 시작해 봤었죠.  알파벳 대소문자 체크부터 시작해서 우리말과는 다른 영어의 기본 문형에 대한 설명으로 오리엔테이션을 했었어요.  한데... 인칭대명사와 be동사가 등장하는 두 번째 수업부터 바로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옅은 한숨을 내리 쉬셨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땀까지 마구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는 짜장면이, 아니 be동사가 싫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be동사가. 싫다고. 하셨죠.






        


 

  한 주 건너뛰고 이제 세 번째 수업.  이번에도 얼굴이 붉어지고 민망해서 한숨이 나옵니다.  어머니께서요?  아니 이번엔 어머니가 아니고, 제가 그랬습니다.  어머니께 설명을 해드리는 내내 혼자 속으로 부끄럽고 민망했거든요.  

어머니는 제가 2주 전에 내드린 숙제의 3배를 미리 해두셨습니다.  인칭대명사와 be동사 부분을 넘어서서 회화교재 책의 이후 이삼십 페이지들을 모조리 외우고 익혀버리신 거예요.  책과 노트, 모두 까맣게 보일 정도로 빼곡했고...  한복 도안과 자작시들로 벽면 가득 붙어 있던 A4용지들 사이로 영어 단어들이 적힌 새로운 메모지들이 가득 늘어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화장대 거울 옆에도 영어 메모지들이 득했어요.  


  마 드러내진 못했지만 여러 가지 저의 모습들이 겹쳐졌습니다.  늘 바쁘다고, 지친다고, 삶이 때로 버겁다고 불평하기도 하죠.  따고 싶은 자격증이나 익히고 싶은 기술들이 있어도 늘 여유가 없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저 자신에게 둘러대기도 했어요.  늘 그렇게 이유를 댔었죠.  심지어 한참 철없던 시절엔, 어린 시절 집안 형편 때문에 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에 대해 무작정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었습니다.   

근데 말입니다, 지금 보니 아니었어요.  어렵고 힘든 시절, 가슴에 품은 꿈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오롯이 긴 세월 치열한 삶을 살아낸 건... 지금의 저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였습니다.  

단 2주 만에 노트 한 권 통째로 빼곡히 채워진 영어 단어들과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회화책을 보면서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죠.  잘 해내실까, 잘 따라오실까 라고 떠올렸던 그 의문들.  그 의문들의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었어요.  여전히 어머니보다 한 수, 아니 여러 수 아래인 제 자신에 대한 의문이었죠.  그래요, 그런 어머니에 비하면...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당신에겐, 그냥 '하수'일지 모르겠어요.



"정말 잘하셨어요. 어머니."



"뭐라하노.  가르치는 선생님이 좋으니까 그렇지.  욕봤다.  저녁 늦게까지."


 



그 철저한 예습 덕분에,  인칭대명사와 be동사를 이용한 짧은 문장까지 이제 더듬더듬 만들어 내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마냥 상기되어 보이십니다.  2주 전의 그 상기된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에요.  그리곤 여전히 문을 나서는 저와 집사람의 손에 양 손 가득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주십니다.  예정보다 30분이나 초과해 끝난 회화 수업이지만 마음이 정말 유쾌해요.  꼭 외우셔야 한다고 내드린 숙제들에 손사래를 치시지만 아마 분명히 그 두세 배를 미리 해두시고 저를 기다리실 겁니다.  놀이하듯 즐겁게,  혼자 회화학원에 나가실 정도가 되실 때 까지는 이 수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꼭 그렇게 만들어 드리려고요.

저 be동사들을

마치 손주들처럼, 사랑하시게 될 때까지.












    

작가의 이전글 선생님, 넥카라 좀 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