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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Feb 27. 2021

선생님, 넥카라 좀 주세요.

제가 차고 지낼만한 걸로






"지난번 하고 비교하면 크기는 그대로네요.  1년 뒤에 다시 똑같이 검사해 봅시다.  

혹시 통증이 있다든지 하면 그전에라도 바로 검사받으시고요."


그렇군요,라고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습니다.

"근데 선생님, 여기가 통증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픈 느낌인 건가요?"


CT화면을 들여다보고 계시던 의사분께서 고개를 돌려 싱긋 웃는 게 느껴졌어요. 

"깊은 부위일 거라 딱 그게 어떤 느낌일지는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아마, 본인이 느끼실 겁니다"


그럼 지금 이게 혹시 그런 느낌인 건가요?라고 물으려다

그냥 별말 않고 똑같이 눈을 마주쳐 미소 짓고 목례를 하곤 진찰실을 나섰습니다.

6개월 전과 변동이 없다고 하니.. 그 말만 듣고선 그냥 빨리 나오고 싶었나 봐요.

한데 그때도 오늘도 실은 똑같은 얘기이기도 합니다.  

현재 상태로선 괜찮은데, 다만 통증이 없어야.

그 아프다고 하는 게 콕콕 찌르는 느낌인지 아니면 복통이나 맹장염처럼 막 쥐어짜는 건지 알 수 없어서 혼자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뭔가 묵직하고 알싸한 느낌인데.  근데 여기가 허리인지 옆구리인지 골반인지.  

헷갈려요, 실은 지금 이게 아픈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결과만 듣는 날이라 진료비 6천원가량만 계산하고 대학병원 주차장으로 걸어갔어요.  

 때 맞춰 집사람 전화가 옵니다.

"뭐래?"


"응, 현재로선 그냥 보기에 양성 같아 보인대.  뭐 증세가 있던 것도 아니고 다른 거 검사하다 찾은 거니."


"음... 그렇게 굳이 알게 된 게 다행인 건가 아닌 건가."


"괜찮아 보인다니 괜찮겠지.  이제 회사 출근할게요."


2주 전에 CT와 엑스레이 검사로 하루 연차를 썼던지라, 오늘은 부득이 반차만 썼습니다.  오후 한 시까지 점심을 먹고 들어가야 해요.  차를 몰아 시내로 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점점 병원에 다닐 일이 잦아지네요.  하나씩 둘씩 종합검사 때마다 몇 줄씩은 빨간 수치들이 나오고 처방받아야 하는 약의 개수도 늘어나죠.  그래 봐야 생활질환들이라 관리하면 되지 싶었는데 우연히 발견해서 이젠 주기적으로 추적검사를 계속해야 할 이건 좀 은근히 맘에 걸리긴 합니다.


이쯤 되면 '걱정' 요정들이 슬슬 머릿속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해요.  갑자기 크기가 커지거나 통증이 확 생기면 어쩌지.  생각보다 깊은 부위라 만약 큰 치료가 필요하면 회사는 괜찮을까.  지금 건강상의 문제로 병가를 오래 쓰면 괜찮으려나.  안 그래도 근무년수 많아졌다고 눈치 받기 시작하는데.  대출도 아직 적잖이 남았고 애들은 아직 둘 다 중학생.  물려받을 유산 같은 건 먹고 죽어도 없는 형편에 그렇게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내 인생은 왜 이리 '애'가 많지?  평생 걱정에 걱정만 하고 살아야 하나.  근데 왜 이렇게 차는 또 드럽게 막히냐.  이러다간 점심때까지 들어가기 힘들 텐데.  아, 전무 인상 쓰는 거 정말 보기 싫다고.


얼핏 그런 생각들에 계속 빠져 운전대를 잡고 있다 룸 미러 속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두 눈썹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요.  미간에 새겨진 두줄의 굵은 세로 주름.  한쪽으로 살짝 비틀어진 입꼬리.  '걱정' 요정이 방금, 찐하게 다녀가셨습니다.     










 떠올려보면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귀 팔랑거리며 신나게 뛰어다닐 코카스패니얼 강아지가 그랬습니다.  지금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두 냥이 녀석도 제각각 그랬었죠.  중성화 수술을 하고 나면 동물병원에서 넥카라를 씌워 줬어요.  굉장히 불편해하고 답답해합니다.  마취가 깨고 나면 그거 벗어내려고 안간힘을 써요.  크기가 크다 보니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 여기 쿵, 저기 쿵 부딪치기 일쑤고 쉬는 것도 자는 것도 불편해하죠.  밥 먹으려고 사료 그릇에 고개를 숙이면 그 넥카라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거든요.

녀석들도 불편해 낑낑대지만 그거 지켜보는 저도 속이 탑니다.  목이 얼마나 답답할까, 저래가지곤 밥이나 물도 제대로 못 마시는데.  잠이라도 좀 편하게 자라 싶어 슬쩍 밤에 제가 풀어주기도 하죠.  그렇게 풀어주면 잠시 멈칫하다 살맛 난다는 듯이 막 우다다다 뛰어다니며 좋아하는 게 눈에 보입니다.


한데 그렇게 방방 뛰다가도, 여지없이 몸을 웅크려 수술한 부위를 핥아대요.  수술한 직후부터 한동안은 아물어 가느라 상처 부위가 굉장히 가렵잖아요.  소독약 냄새도 그렇고.  열심히 열심히 스스로 그렇게 핥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대로 덧나거나 심한 경우엔 다시 곪을 수도 있어요.  잘 아물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불편한 넥카라를 채우고 지내야 할 시간이 더 늘어나요.  제대로 잘 채우고 있어서 스스로의 상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일주일이면 되는데, 그렇게 상처가 덧나거나 커지면 더 오래 목에 차고 있어야 합니다.  별도로 치료를 더 해야 하거나, 드문 경우지만 재수술을 할 수도 있어요.  그 상처가, 아물지가 않아서.





아 살맛 안난다냥












문득, 운전하다 올려다본 룸 미러 속 제 얼굴에다가 넥카라를 좀 씌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을 때가 많았습니다.  주고받는 거였죠 상처란 것도.  촘촘히 얽힌 관계들 속에서 불가피하게 받았던 그 상처들 자체보다도 실은 나 자신을 더 힘들게 한건...  그걸 쉽게 떨쳐내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어요.  툭툭 털어내며 쉬이 아물게 하지 못하니 늘 덧나고 곪게 되죠.  이미 지나간 일들에 연연하고, 늘 일어나는 일에 흔들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붙잡혀 잠 못 이루곤 하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 몸을 웅크려 상처들을 제가 스스로 계속 핥아대고 있는 거예요.  나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존재는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인데도.


쿨하게 보이고 싶어서(실은 쫄아서) 검색해보지 못했던 이 병명에 대해 차분히 좀 몇몇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음...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서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아예 모르고 지내는 경우들도 많다는군요.  거의 대부분 '양성'이고 아주 드문 경우 예후가 좋지 않을 수 있답니다.  아주 드문 예후, 라는 말에 집중하면 나는 또 열심히 스스로 상처를 핥아대고 또 핥아대겠죠.  거의 대부분 큰 문제없다잖아요.  그거냐 아니냐라고 생각에 빠져봐야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기약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지금 건강히 보낼 수 있는 작고 소박한 즐거움들이 있죠.  이번 연휴엔 지인들 만나 운동도 좀 하고,  또 꼬맹이들과 함께 사천 쪽으로 마스크 쓰고 조심히 당일 드라이브 여행도 다녀오기로 했어요.  맛있는 거 먹고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고.  만들어야 할 건프라도 쌓여 있고, 보고 정리해야 할 영화 리뷰 생각들도 머릿속에 가득합니다.  아, 이거 바쁘잖아요.


대학병원에서 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운전길이 어느새 확 풀리는 느낌.  이런 시간 여유면 잠시 좋아하는 충무김밥집에 들러 요기를 좀 하고 들어갈 수도 있겠어요.  그 참에 잠시 한군데 더 들러볼까 합니다. 냥이들 데려가곤 하는 단골 동물 병원에.  거기 가서 선생님께 좀 여쭤 봐야겠어요.

혹시 말입니다 선생님.  제가 좀 찰만한... 큼지막한 넥카라가 있으시냐구요.  











바로 요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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