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나나
정상은 아니야
" 아무래도, 정신병자 같아. "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든 아님 서로 철저히 무시하든 간에, 오래 동안 누군가와 지긋지긋한 감정싸움으로 치닥거리다 보면 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딱 그 생각뿐이었어요.
어떻게 저리 정신병자 같지?
감정의 극단을 곧잘 오고가는 K는 어쩌면 조울증인가 싶고, 모든 게 자신에 대한 음모라며 시시때때로 예민해지는 J에겐 무슨 피해 망상증이 있나 싶었죠. 업무에서부터 인간관계까지 모든 걸 딱 자신의 스타일대로 따르지 않음 당최 못 견디는 S는 깊은 강박증이나 편집증이 의심됩니다. 무엇보다 그 징글징글했던 끝판대장 C는 주위 사람들을 죄의식 없이 착취하는 심한 자기애적 성격 장애가 굉장히 중증으로 보였죠.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모두 어떤 정신적 결함이 있는 건 아닐까 싶지만... 문제는 그들도 다 각자 머릿속에서 똑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단 거였어요. 똑같이 그러고 있는 겁니다. '알고 보면, 나 빼고 너희들 다 이상해.'라고.
잘 나가면 그게 얄미워서 비정상이고, 말이 많으면 그 아는 체가 미워서 비정상, 반대로 말이 없으면 그 답답함에 짜증 나서 비정상이 되죠. 뒤처지면 그 부족함이 못마땅해서 또 비정상이란 얘기를 듣기도 합니다. 결국 그렇게 따진다면 이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 그 누구도 조금씩은 정상이 아닌 거잖아요. 달리 말해서 모두가 비정상인 그 상태 전체가, 오히려 정상인 걸로 보일 수도 있는 겁니다. 혼란스러워져요. 뭐가 정상인지 아닌지, 누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점점 구분하기 힘들어지죠. 그럴수록 점점 더 은연중에 자기 암시를 거는 걸까요.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그 일종의 심리적 마지노선. 이건 내 문제라기보단 사실 저 인간들의 문제인 거지라고 결론을 내리면... 한결 수월하고 편해집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비난을 퍼부으면 되는 거예요. 충분히, 나는 그럴만하다고 믿으니까.
내가 보기에 우린 모두
이게 필요해
매튜 퀵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2012년작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원제: Silver Linings playbook)은 전형적인 로맨스 코미디라기보단 실은 정서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의 '치유'에 관한 드라마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자면 굉장히 전형적이죠. 첫 만남부터 티격태격하던 두 주인공이 어느새 사랑이 싹트고, 주변 인물들의 도움 속에서 모두가 결국 행복하게 손을 맞잡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두 남녀 주인공의 첫 등장들에서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아요. 이 둘뿐만 아니라 나머지 인물들도 조금씩은 다 마찬가지. 이들 모두의 '정신 상태'들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거든요. 보기에 따라선 이게 대체 뭔 영화지 싶을 정도로 심각한 정서적 결함들을 보이는데... 그래서 내내 또 그게 현실적으로 와닿더란 말이죠. 적어도 제겐 그랬습니다. 영화 속 '미친' 인물들의 '미친' 짓들 속에서 묘하게 거울 속 제 모습이 언뜻 비치는 그런 느낌?
아내의 외도와 그로 인한 폭행으로 인해 가정과 직장을 다 날려버린 남자 주인공 팻(브래들리 쿠퍼). 한참을 정신병원에 구금되었다 돌아온 후 분노조절장애, 피해망상, 극심한 조울증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죠. 불의의 사고로 느닷없이 남편을 잃었던 여 주인공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어떤가요. 그 큰 충격과 상실감에 무너져 남편 회사의 동료들 모두와 잠자리를 가졌고, 그래서 '걸레'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둘은 우연히 마주치자마자 상대에게 악다구니와 쌍욕들을 퍼붓죠.
이 구역, 아니 이 작품 속 가장 '비정상'인 캐릭터는 단연 이 두 사람으로 보이지만 어딘가 모를 '마음의 병' 한두 가지씩을 안고 사는 건 이들만이 아닌 거 같아요. 아들을 걱정스레 지켜보는 아버지도, 펫을 도우려 애쓰는 단짝 친구도 어딘가 측은한 구석들이 보입니다. 완벽한 결혼생횔속에 있는듯한 티파니의 언니도 그러하고, 심지어 두세 장면 슬쩍 출연하는듯한 주변 인물들까지도 채 드러내지 못하는 마음의 병과 스트레스를 모두 안고 있죠. 편집증, 강박증, 집착,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의 공황장애에 이르기까지.
슬쩍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문득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들이 겹쳐 보이더군요. 강한 척, 다 괜찮은 척 보이려 애쓰지만 실은 건드리면 툭하고 무너져버릴 거 같은 영화 밖 현실 속 수많은 캐릭터들. 그들의 '미친'짓들과 그에 버금갔을 나의 '미친' 짓들까지... 모두 다 스르륵 눈앞에 스쳐 갑니다.
샤방샤방 빛나는 주인공들이 꿀 떨어지는 스파크들을 한두 번 정도 튀겨줘야 할 법한 로맨스 무비인데도, 얼핏 메마르고 건조한 사이코 드라마 같은 영화의 전반부는 살짝 당혹스럽기까지 하죠. 제각각 우울증과 피해망상으로 시시각각 신경 안정제를 들이켜야 하는 두 남녀의 만남 이후 그림들도 그리 고상하진 못합니다. 검정 비닐 봉다리를 뒤집어쓴 남자 팻과, 역시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마주 선 여자 티파니가 백주 대낮 길거리서 '니가 더 싸이코야'라며 독설을 퍼붓는 장면들에선 그놈의 로맨스 따위, 뭔 개뿔. 당장 총이라도 들고 나와서 상대 머리에다 방아쇠를 당겨도 이상할 것 없는 살벌한 분위기죠. 우여곡절 끝의 그 첫 데이트마저 '난 돌았어도 너랑 동급은 아니야'라며 상대를 개무시하는 팻의 뻘짓으로 시작해, 열 받은 티파니가 날리는 통렬한 가운뎃손가락 쌍욕으로 마무리되고 맙니다. 아니 이거 아무리 봐도, 도대체 로맨스 무비 맞는 거냐고.
하지만 신기하게도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첨엔 정 붙이기도 힘들었던 이 두 또라이 남녀에게 마음이 점점 기울어질 겁니다. 안쓰럽고, 연민을 넘어선 왠지 모를 동질감마저 서서히 들기도 하죠. 이 작품이 이렇게 점점 '이뻐' 보이는 건, 무엇보다 두 주인공 역할을 각각 맡았던 브래들리 쿠퍼와 제니퍼 로렌스의 지분이 커요. 말 그대로 '미친' 연기가 정말 '미쳤었죠'. 특히 촬영 당시 21세였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극단을 오가는 정신적 피폐함과 복잡한 감정 기복들을 능청스럽게 연기했던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는 한마디로 이 작품의 백미였습니다. 이 배역 연기 하나만으로 제85회 아카데미에선 최연소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70회 골든글로브, 제19회 미국 배우 조합상, 제18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거기다 제22회 MTV 영화제 모두를 통틀어 여우주연상 부문을 혼자 독식했었으니까요.
물론 이 작품 자체만으로도 평론과 흥행 모두에 있어 그 무게감이 만만찮았습니다. 아카데미에선 은근히 외면받는 장르인 로맨틱 코미디였음에도 핵심 부문인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색상 포함 모든 연기 부문까지 총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는 '기현상'을 낳았던 작품이기도 했죠. 사골 같은 영화입니다. 처음 볼 때보다 두 번 세 번째 볼 때 더 인상 깊었어요. 전형적인 대사와 연기들로도 보이지만, 왠지 곱씹어 볼수록 감칠맛이 우러날 겁니다.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이 찐득한 관계들의 시큼텁텁한 그 맛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
'고진감래'에 가장 가까운 영작 표현중 하나라고 알려진 유명한 영어 속담이죠. 매튜 퀵의 원작 소설과 이 영화의 제목 양쪽 다 왜 이 아리송한 표현이 붙은 건지는 명확히 알 순 없습니다. 모든 구름들의 가장자리엔 그러니까 빛나는 저 은색 라인들이 있다고? 시커멓게 찌푸린 먹구름 뒤엔, 다만 가려졌다 뿐이지 늘 그곳엔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들이 가득하다는거겠죠. 그러니 지랄 같은 날씨들이 이어져도 실은 우리 머리 위엔 찬란한 저 태양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하듯이, 먹구름 같은 썩소로 매일 마주하는 저 싸이코들에게도 선비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inner peace를 외치면 모든 게 해피엔딩일 거란 그 희망고문을 의미하는 건지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만나자마자 '미친놈, 미친년'이라 서로 물어뜯어대던 이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아가는 과정들은 전형적이지 않아서 분명히 꽤 흥미롭습니다. 아닌 척하지 않아요. 내가 '아프다'는걸 알고 있고, 그걸 굳이 포장하거나 미화하려 애쓰지 않죠. 정서적 결함을 가진 두 사람이 그 상처를 드러내고 까뒤집어가며 그러면서,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가식적인 사탕발림보다는 당혹스러운 그 솔직함들이 더 현실적인 공감으로 와닿아요. 난 지극히 정상이고, 이 구역의 미친 자는 오로지 너뿐이야 라며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고깝게만 대하고 있는 거라면... 그런 나 자신도 영화 속 팻이나 티파니와 그다지 다른 모습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나의 자뻑으로 누군가의 결함을 애써 후벼 파려 하지 말고, 반대로 나의 결함을 다른 누군가의 결함들과 때론 등가교환하며 시크한 척 흘려버리며 살기.
쉿, 다시 한번 솔직히 말하자면 말입니다.
사실 우린 모두 다, 아파요.
그러니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예의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며 이렇게 미소 띠며 말해주고 싶어 집니다.
우리 모두의 이 '미친 짓'들을, 기꺼이 사하겠노라고.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이미지들의 모든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