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내 글이 좋았다

by 혜리영


벌써 100일이 다가온다. 잠들기 전 문득 생각했다. 채울 줄 몰랐는데, 진짜 채웠네. 100일의 시간을 꼬박꼬박 채운 것이 대견했다. 무엇을 담았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의 하루를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 칭찬할 만 했다. 이게 뭐라고, 매일 쓰다보니 매일 나를 만나고 매일 내가 웃고 울었다. 시작한 첫 3일은 가볍고 가벼운 마음이었다. 겨울이이 물러나고 봄이 오려나 기다리던 초봄. 그리고 이어진 막내의 재발, 입원, 퇴원. 나를 휩쓸고 간 허무, 없어진 미래. 다시 일어나는 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내 안에 무슨 힘이 있어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가능했는지. 그 시절 쓴 글을 다시 읽어봐도 나는 알 수 없다. 그나마 얕은 시선으로 찾아낸 것이 있다면, 두 가지. 어린 시절 넘치도록 충분한 사랑을 받아 나에게는 썩지 않는 사랑의 비료가 있다는 것. 또 하나는 하느님이다. 성령의 바람이 나를 일으켰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100일의 시간을 빼곡히 적어보니(아직 며칠 남았지만) 나는 꽤 괜찮았고, 웃고 우는 일 모두 잘 지나왔다.


어느 새 나는 100일 이후를 생각하고 있다. 성취욕도 낮고, 경쟁심도 낮은 나는 이 정도의 계획이 적당한 것 같다. 사실 이 100일도 다 채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며칠 빠질 것이고, 그러다가 그만두더라도. 그렇더라도 해보자. 그냥 그정도의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아님 말지 뭐. 어떤 것을 시작할 때 내가 하는 생각이다. 아님 말지 뭐. 하다가 아님 말지 뭐, 그렇게 100일을 채웠다. 100일을 마쳐도 나는 그대로 일 것이다. 여전히 회사로 스트레스를 만땅 받을 테고, 가족이 좋다가 힘들다가 할테고, 나 자신에 대해 알다가 모르다가 할테다.


그래도 이렇게 나를 만난 100일은 소중했다.


오늘 ‘오늘의 일’을 쓰면 감정에서 객관적이지 못할 것 같아서, 오늘 ‘어제의 일’을 썼다. 매일 쓰는 글의 글감은 늘 어제의 일이었다. 당일에는 불 같고 얼음 같은 일들도 하루만 지나면 불과 물이 사라진 원석 같은 사정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내가 나의 감정에 속지 않고 그대로 상황을 보고 싶어서. 어제의 얘기를 했다. 어제의 나를 살펴본 오늘의 내가 글을 남겼다. 그리고 내일의 내가 이 글을 읽으며 감탄하겠지.


내가 쓰고도 다시 읽으면 글이 좋았다. 나는 팔이 내 안으로 아주 정확하게 굽은 사람이라, 내 글이 좋았다. 내가 내가 쓴 글이 좋아서 정말 좋았다. 이렇게 100일이, 글쓰기가 나를 짙은 시간들에서 지켜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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