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 거네요?
차장님과의 대화들
우리 팀 차장님과 둘이 마주하면 괜스레 마음 깊이 있던 이야기를 불쑥 꺼내게 된다.
별것 아닌 일상들도 차장님과 나누고 나면 더 감사하고 유쾌한 일이 된다. 무거운 마음들을 조심스럽게 내놓을 때면 그저 고개만 끄덕이실 뿐인데 마음 가운데가 포근한 이불로 덮이는 기분이 들곤 한다. 워낙 책을 많이 읽으시니 그와 비례하게 생각이 깊으시며, 유머와 긍정까지 겸비하셨다. 무엇보다 나보다 근 10년을 더 사신 인생 선배이시다.
팀원 분들은 각자 개인 점심약속을 가거나 도시락을 싸왔고, 차장님과 나 두 명만 남은 날이었다. 이때다. 조용한 곳에 들어가 양질의 점심을 먹으며 차장님과 단 둘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
직원 식당 메뉴가 별로라는 핑계로 밖에 가서 같이 점심 드실 수 있는지 여쭈었다 (대화가 고픈 내가 거의 조른 거나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렇듯 활짝 웃으며 흔쾌히 좋다고 하셨고, 그렇게 둘이 마주 앉아 야채 가득한 비빔밥과 뜨듯한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의 대화 역시, 그냥, 좋았다.
그 말들을, 생각들을 기록해 본다.
#대화 1.
차장님에게는 이미 장성한 스무 살 중반의 두 딸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제 여덟 살이 된 내 두 딸들의 일상을 전할 때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차장님이 내 나이일 적 엄마였던 본인과 두 딸들의 모습을 회상하고, 또 그리워하시는 것일 테다.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남편 이야기로 넘어간다. 요즘 남편이 아이들과 나에게 너무 지시조로 말을 한다고 했다. 남편과 사이가 좀 친밀해야 집의 분위기가 더 편안할 거고, 아이들도 그 온도를 다 느낄 텐데 속상하다고 투덜댔다.
차장님은, 본인의 남편도 그랬다며 맞장구를 쳐주신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했던 말이,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임을 늘 명심하고 말하라고 했단다.
속으로 생각했다. '차장님, 인생 선배로서 제 대신 저희 남편에게 말씀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헤헤.'
부부관계에 대해서도, 사실 아주 사이가 좋은 부부가 얼마나 있겠는지, 십 년 넘도록 생얼굴 보면서 사는데 어찌 좋은 말만 할 수 있겠냐 물으신다.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다, 본인의 동생이 좀 특이하게 남편과 사이가 좋은데, 곁에서 보니 서로 우쭈쭈를 과하게 많이 해준다며, 차장님도 잘 못하지만 보고 노력하려고 한다고 슬쩍 건네신다. 잘 먹는다고, 잘 잔다고까지 칭찬한다고 말이다.
#대화 2.
어쩌다 이런 주제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좀 진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늘 그렇다)
"차장님, 이렇게 말하면 너무 쓸데없이 진지하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는데.. 요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드는 생각이 하나 있어요. 오래되었어요.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맞는지, 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건지, 그냥 이 세상에 살게 되었으니, 기왕 잘 살려고 애쓰고 있는 건 지, 이런 것들이요."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차장님은 깊고 그윽한 갈색 눈동자로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몇 마디를 하신다.
"나이 40이 불혹이라고 하잖아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고. 그만큼 생각이 깊어지는 시기인 것 같아요. 저도 마흔 살 시작하면서부터 중반까지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더 잘할 수 있는 걸 찾으려고 했고 모든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했고. 정말 부단히 애를 쓰며 지낸 시간들이었어요. 한 몇 년을 그랬던 것 같네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이 모든 것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더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 말이에요.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바라기만 하고, 또 다 이루지 못하는 모습에 좌절하는 시간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충실히 해 나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막연한 걱정만 가득한 미래를 잡으려다 현재를 놓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이후엔 매일 주어진 순간들을 열심히 살아왔고, 그러다 보니 지금 오십이라는 나이가 된 거예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때 치열하게 한 고민들이 오늘에 집중하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된 것 같기도 해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가신다.
"사십 정도 되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생각을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하는지, 혹은 가볍게 지나치는지에 따라 그 이후의 삶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주 많이는 아니고, 조금이요."
사실 애쓰며 사는 삶이 맞는지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차장님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들은 앞으로를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건 각자의 선택이라고 말이다.
나의 치열한 고민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것이며, 분명 의미 있는 시간들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대화 3.
'후회를 하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걱정을 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며, 즐거우면 현재를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으셨다고 한다. 나도 어디선가 들은 말이긴 하다.
좋은 사람과 맛있게 점심을 먹고, 속에 있는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화를 마친 후,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한 마디를 했다.
"지금 저는 차장님과 식사하고 대화한 게 즐거웠어요. 지금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 거네요. 잘 살고 있는 거네요?"
어쩌면, 나는, 우리는 이미 현재를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