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할 때부터 피곤했다.
며칠째 밤 12시까지 잠을 안 자는 아이들 덕분에. 하루 다섯 시간 겨우 잔 지 몇일째인지... 매일 풀어야 하는 네다섯 장의 수학문제집은 어둑해져셔야 앉아 있었다. 영어 청독은 30분도 겨우, 아니면 거의 하지 않은 지도 몇 주 째이다. 밤까지 해라, 왜 안 하냐 실랑이를 벌이다 잠들기 다반사였다. 요즘, 더 심해졌었다.
사무실 책상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는 머그컵부터 집어 들었다. '커피가 필요해. 그것도 투샷.' 회사 카페로 헐레벌떡 향했다. 아침 일곱 시가 겨우 넘었을 뿐인데 어느새 열 명은 더 서 있는 카페 앞. 흠. 그래도 커피 향이라도 마시니 정신이 반 즈음은 깨어나는 듯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게슴츠레한 눈으로 서 있는데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같은 부문에서 근무했던 팀장님이다. 같은 워킹맘 선배로서 밥 사달라고 졸랐던 분이기도 했다. 당시, 회사일도 육아도 거뜬하게 해내는 나름의 노하우를 건네 들었었다. 회사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 이대로 직장 다니는 게 맞을지 고민하는 나에게 '그래도 내 손으로 돈은 벌어야지. 이 세상 혼자 사는 거다. 자립할 줄 알아야 해'라고 따끔하게 현실 조언을 해주신 분이기도 하다.
'팀장님! 잘 지내셨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자 나만큼 환하게 웃으며 받아주신다. 세상에, 몇 달 전에 뵈었을 때 보다 얼굴이 너무 밝아지셨다. 근무하는 층이 달라서 로비에서 몇 번 마주치며 눈인사만 해왔을 뿐 이렇게 말을 한 건 거의 일 년 만이었다. 몇 년 전에 아드님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공부는 꽤 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 물었다.
"팀장님, 왜 이렇게 얼굴이 좋아지셨어요~~!"
"아하하 항 그래? 하하"
"아드님은, 학교 잘 다니죠~?"
"그럼, 잘 다니지."
"지금, 고등학교 몇 학년....?"
"대학 갔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다. 좋은 곳에 간 거다. 이럴 땐 어디 대학 갔는지 묻는 게 더 낫다.
"좋은 데 갔나 보다. 그렇죠?"
(환하게 웃으며)"응, 서울대."
"우오오오. 정말요? 팀장니임~ 너무 좋으시겠다. 아드님 잘 키우셨어. 대단해요. 팀장님!!"
나는 팀장님의 어깨를 몇 번이나 쳤는지 모르겠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다. 팀장님한테 많이 배워야겠다, 노하우 좀 전수해 달라. 회사 일도 잘하시면서 어쩜 그렇게 뒷바라지도 잘하셨냐. 입에서 쉴 새 없이 질문이 튀어나왔다. 감탄사와 함께.
공부를 잘하시는 분이었다. 남편분도 유수 기업에 다니신다니 역시 수재였을 테고. 아드님도 뛰어난 유전자를 받았을 거다. 기본이 되어 있는 걸 테다. 그래도 좋은 머리만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서울대를 가는 건 아닐 거다. 뭔가 노하우가 있을 게 분명했다.
좀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바리스타 분들이 왜 이리 커피를 빨리 내리는지. 짧은 시간 동안에라도 뭐라도 얻어가고 싶어 비법 좀 알려달라고 진짜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팀장님은 딱 몇 마디만 하셨다.
"지금 몇 학년이지?"
"4학년이요."
"그럼, 지금부터 잘해야겠네. 애 비위 잘 맞춰 주면서, 잘 구슬리면 돼. 감정 잘 살펴보면서. 관계를 잘 만들어야 해. 부모랑 애 사이의 정서가 제일 중요해."
몇 년 전 출근길에 만났을 때 휴가를 간다고 하셨었다. 아드님과 야구 보러 가야 한다고. 손잡고 데이트도 한다고 들었다. 그래, 엄마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게 사실이었다. 유튜브에서 보던 서울대 보낸 엄마가 내 앞에서 직접 말을 하니 더 신뢰감이 쌓였다.
더 묻고 싶은데 커피가 이미 나와버렸다. 아쉬워하는 내 눈빛을 읽으셨는지 한마디 곁들이셨다.
"팀장님, 회사일 처럼 하면 돼. 자료 찾아보고, 정리하고, 상사랑 팀원 감정 살피듯이 내 자식 감정 들여다 보고. 영리하게 맞추고. 팀장님 잘할 수 있을 거야."
와, 대단하시다. 회사 다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하셨어요.라고 묻자. 내 팔을 탁 하고 잡으시면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을 이으셨다.
"팀장님, 회사일 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해. 뭐가 중요한 지 잘 생각해 봐. 알았지?"
아.....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이를 잘 챙겨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귀찮아서, 잘 몰라서, 힘들어서 뒤로 미룬 적이 있었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오히려 명확하게 주어진 일을 하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회사일에 집중한 날도 많았다. 어떨 땐 오히려 집에 가는 것보다 야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름 육아나 학습 정보를 많이 알아보고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충분했다고 자신할 순 없었다. 퇴근 후 저녁 차리고 설거지에 청소 말고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안아주었나 싶었다.
바쁘다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한다고 아이들의 공부를, 아이들과의 시간들을 저 멀리 제쳐두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의 일이 잘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 또한 제 할 일을 잘 해 나가며 성장해야 나 또한 행복하지 않을까. 게다가 초등학교 고학년을 바라보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 서울대 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하는, 그래서 자신감이 충만한 그런 아이들로 크길 바래왔다. 회사 일, 내가 바라는 일, 아이들의 성장.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말고 그 균형을 잘 잡아야 할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현명하게 지내봐야 겠다.
아그들아. 오늘부터 엄마는 마음을 다시 다잡을련다. 회사 다녀와서 조금이라도 틈을 내어볼게. 너희들의 하루 할 일들을 좀 더 챙겨볼게. 무엇보다 너희와 눈 맞추고 얘기도 많이 들어주고, 같이 웃고, 조금이라도 더 안아줄게. 앞으로 너희 앞에 얼마나 다양한 일들과 상황이 펼쳐질 지 모르겠지만, 옆에서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길을 곁에서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볼게. 부지런히 노력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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