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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Nov 06. 2024

엄마가 선물한 옷을 입으면

옷장 문을 열었다. 무엇을 입을까....

가운데 옷걸이부터 옆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착착착. 한 해가 지나면 입을 옷이 없다고 하더만, 딱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수어 개의 옷들을 뒤적거리던 중 저 구석에 걸려있는 원피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면 재질로 만들어진, 심플하지만 디테일이 멋들어진 단정한 오피스룩 풍의 남색옷이었다. 손을 뻗어 옷장에서 꺼내 들었다. 아직도 새 옷 같구나. 소매 끝을 만지작 거리다 보니 옷을 고르러 다니던 날, 옷을 입고 손님들을 맞이했던 순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 아가들의 돌잔치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 둘을 낳고 수개월 동안, 아니,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거의 집에만 있었다. 쌍둥이를 품고 있었기에 출산 2개월부터 안정을 취해야 했다. 아가들을 만난 후에는 초보 엄마답게 신생아의 울음을 분간하지 못한 채 1초의 틈도 없이 아이들에게만 매달려 있었다. 육아휴직과 동시에 시작한 남편의 사업 덕에 육아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부족한 잠으로 누레진 얼굴, 관리되지 않은 검은색 긴 생머리, 제때 끼니를 때우지 못해 바싹 마른 몸을 하고는 수유복만 입어왔었던 차였다.


그런 딸내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아이들이 태어난 지 1년이 다가올 무렵, 엄마는 나에게 금색 봉투를 하나 손에 쥐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백화점에 가서 제일 비싼 브랜드 옷 하나 사 입어. 곧 있으면 돌잔치도 있고, 복직도 해야 하니까. 회사에서 입고 다닐 수 있는 걸로. 이번 주말에 아빠랑 내가 애들 볼 테니까, 이 서방이랑 같이 다녀와. 알았지?"




돌아오는 토요일. 괜스레 들뜬 마음으로 꽃단장을 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팩트의 뚜껑을 열었다. 퍼프를 깊게 눌러 바닥에 눌어붙은 액체를 묻혔다. 거칠어진 피부가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싶어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거울에 비친 생기 없는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뭐, 어쩔 수 없지.' 하고는 집을 나섰다.


백화점에 도착했다. 매번 가던 영캐주얼 매장이 아닌 한 층 아래, 브랜드들이 즐비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젠가 아웃렛 매장에서 눈여겨봤던 원피스가 떠올랐던 거다. 예전에 매장 앞을 지나가며 눈으로만 안을 살펴보단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남편과 이 옷, 저 옷을 만지작 거리고, 입어보기도 하며 옷을 골랐다. 거울에 비친 메마른 몸이 한 번씩 속상하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했다. 잠시, 아주 잠시 육아의 세상을 잊고 온전히 나만 바라보는,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참으로 오랜만의 시간이었다.


그날,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노랑, 주황, 빨간색 단풍이 만개했었다. 새파란 하늘에는 하얀 몽실 그룸이 발랄하게 얹어져 있었다. 적당히 시원한 상쾌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렸다. 내 마음도 살랑거렸다.


그 원피스를 입고 돌잔치를 했다. 손님들을 맞이하고 사진도 찍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껏 웅크려져 있던 어깨가 괜스레 펴졌던 것 같다. 엄마가 사준 새 옷을 입고 있으니 이유 모를 힘이 솟아나는 듯했다. 두 아기들을 번갈아 안으며, 사람들에게 축하인사를 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때 우리 엄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신이 사준 옷을 입고 돌잔치를 한다며 손님들을 맞이하는 딸의 모습을 바라볼 때, 어느새 1년이나 두 아이들을 키워낸, 엄마가 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연신 활짝 웃으며 나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던 엄마의 마알간 눈동자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낀다며 잘 입지 않던 옷이었다. 해가 지날수록 유행에 서 멀어지는 것 같아 옷걸이에 걸어 두기만 했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상하게 한 번 입어보고 싶었다. 옷 안으로 몸을 옮기고 양팔을 집어넣었다. 엄마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했다. 거울을 비춰보니 제법 잘 맞았다. 볼록해진 뱃살 덕에 허리가 좀 불편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회사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 노트북 전원을 켰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하루 할 일을 적으면서 내내 기분이 좋았다. 10년 전 새 옷을 입던 그날의 감정과는 또 달랐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아났다. 오늘은 왠지 멋진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나도 언젠가, 아이들이 커서 인생에 있어 기억할 만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좋은 옷 한 벌 사줘야지 다짐도 해본다. 그럼, 내가 엄마에게 받은 기분 좋은 포근함을, 잊지 못할 기억을 아이들에게도 선물할 수 있을 거라 바본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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