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나는 당신의 Big fan 입니다.

미생, 그들이 있었다.

by 리유


그녀의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대표이사실 왕비서. 회장님 추천으로 인사팀에 꽂혀진 사람.

유치원생 두 딸을 둔 엄마, 큰 키에 동그란 얼굴. 까무잡잡한 피부. 무채색의 옷차림. 사람들과 허물없이 대화하며 이따금씩 호탕하게 웃는 사람.

그때는 몰랐다.

내가 그녀의 Big fan 이 될 줄은.


그녀와 같이 일을 시작한 건, 그녀는 팀장, 나는 매니저로 막 승진한 때였다.

승진이라는 달콤한 당근을 먹고 난 직후라, 우리 둘의 열정은 말 그대로 뜨거웠다. 앉아만 있어도 등과 머리에서 불길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습을 상상해도 좋다.

당시, 그녀에게는 인사제도를 개편하라는 큰 미션을 받은 상태였다. 해외의 성과관리, 인재관리 제도를 회사 실정에 맞게 만들고 도입하는 것.

어느 날, 그녀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들고 나타났다. 책상에 올려두니 적어도 30센티는 족히 넘을 양이었다. 게다가 모두 영어. 헉.

읽어볼 게 참 많다. 그렇지? 하나씩 분류해서 차근차근해보자. 그러다 보면 금세 하게 될 거야. 나도 공부할 테니까, 대리님도 차근히 읽어보고, 어떻게 적용시킬지, 일주일 뒤에 같이 얘기해 보자.’

어렵다, 언제 하냐, 복잡하다. 등의 부정적인 단어는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꽤나 촉박한 일정이었는데 티끌만큼의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배울 게 생겼다는 지적 호기심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찬 말투는 당연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일주일 뒤, 다시 회의실.

그녀는 정말 모든 자료를 읽어왔다. 요약도 했다. 게다가 어떤 제도를 언제부터 어떻게 적용시킬지까지 구상해 왔다. 간신히 내용만 이해해 온 내가 부끄러웠다.

두 아이의 엄마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양을 해 오셨는지 이제보니 참으로 기하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그녀가 기획한 모든 보고서는 한 번에 통과되었고, 나는 방향에 맞추어 자료를 만들어, 실무자들과 협의만 해내면 되었다.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더 책임감을 갖고 완벽히 해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뚜렷한 목표와 지지해 주는 사람, 그리고 술술 풀리는 일들.

무언가에 온전히 몰입하면 잠을 자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피로는 커녕 오히려 더 활기차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가 딱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부족했던 실력이 크게 도약한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비단 지식과 스킬만이 아니었다. 방대한 일이 주어졌을 때 이를 대하는 자세, 해결해 나가는 방법,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법, 그리고, 잘해 냈을 때 축하를 즐기는 법도 함께 배웠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했다. 단 한 번도 일적으로 그녀에게 실망하거나 불만을 가졌던 적은 없었다.

상사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는 게 과연 이 세상에 있을 수 있 말인가.


이후, 순환근무로 인해 그녀와 한동안 다른 팀에서 일을 했고, 나는 두 딸아이의 엄마가 되어 다시 만났다.

5년 만에, 교육팀에서.

그녀의 리더십은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 눈빛은 보다 강렬했으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명확하고 단호했다. 팀원들은 그녀의 지휘아래 조화롭게 움직였다. 마치 아름답고 웅장한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같았다.

그녀는 나와 일 호흡이 맞는다 생각했는지 대부분의 임원 보고 건을 맡겼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 내용이 아니다. 조직도를 내밀었다. 교육뿐만이 아니라 기업문화까지 업무가 더해진단다. 게다가 임원 자리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밑에 두 개의 팀이 소속되어 있었다. 부문장이 그녀의 승진을 담보할 테니 자료를 만들어 오라 지시한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나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몇 주간에 걸쳐 조직도를 정교하게 그렸고, 각 팀의 목표, 방향성, 할 일들, 팀원 구성까지 상세하게 적어 넣었다.

몇일 뒤, 준비했던 안건이 보고된 날 오후.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가방은 자리에 있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옆 팀장이 하는 말을 들으니, 승진이 무산되었단다. 부문장들이 다 같이 모여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어떤 임원 한 명이 일의 범위가 너무 적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부문장은 그걸 반박하기는 커녕 적극 동의까지 했단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네가 임원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통과되지 않았다고 전했단다. 최악이다.

이후 그녀에게서 예전만큼의 의욕은 볼 수 없었다. 그저 주어진 대로, 흘러가는 대로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십수 년간 다닌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가 떠나던 날, 회의실에 혼자 앉아 한 시간은 훌쩍였던 것 같다. 회사 생활을 하며 온전하게 의지하며 함께 한 분이었다. 비단 업무뿐만은 아니었다. 삶을 대하는 자세까지도 가르쳐 주신 분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 한 공간이 없다니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만 같았다.


그녀가 회사를 떠난 지 5년이 되었다.

지금, 나는 그녀가 맡았던 교육팀의 팀장을 맡고 있다.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떠올린다. 그녀라면 이 일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을까, 팀원들에게는 무슨 일을 위임했을까. 상사에게는 뭐라고 보고 했을까.

고민이 많아질 땐 불쑥 연락도 한다. 그럼 언제나 그랬듯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안녕~ 잘 있었어?

잘할 거야, 네가 다 할 수 있는 일이야.

이렇게 한번 해보면 어떨까? ‘


그녀의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켠 오늘 아침,

문득 그녀의 모든 것이 그립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일 한번 신나게 해보고 싶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팀장님이 그리셨던 일, 내가 해낼게요.

기다려 보세요.

아셨죠?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