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의 긍정성
나는 개인적으로 슬럼프가 오는 순간을 반긴다. 어렸을 적부터 모자란 재능으로 음악을 하느냐고 매번이 고비였고, 좌절이었었다. 내가 경험한 피아노라는 악기는 연습하는 만큼 늘지만 연습을 하는 과정 동안 눈에 보이게 늘지 않았다. 매일매일 몇 시간씩 붙들고 연습하지만 내일이 오고 다시 오늘이 되었을 때, 처음 연습하는 순간에는 늘 똑같이 부족했다. 어제 분명 연습을 하고 간 부분이 오늘이 되면 늘어있어야 하지만, 어제 연습을 시작할 때와 똑같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다시금 악보가 손에 붙는 속도가 어제보단 조금 빨라진 것 같다.
이렇게 늘어간다. 매일의 시작이 똑같지만 그날 하루 동안 손에 익어가는 속도가 조금씩 당겨진다. 그렇지만 매일 이렇게 처음 순간을 더디게 만나다 좌절을 할 시점이 온다.
“언제 늘지, 이 정도로 재능이 없나, 이건 안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 슬럼프가 찾아온다.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 때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사실 예전에는 이때 정말 피아노를 그냥 며칠 놓아버리기도 했었다. 오랜 시간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했을 때, 내가 지속했던 이 노력의 시간들이 빛을 발하기 전에 슬럼프가 찾아온다고"
내가 생각하는 슬럼프는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슬럼프가 오지 않는다. 슬럼프는 내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 그래서 스스로의 목표치, 기준치가 높아졌을 때, 이제 내가 한 노력이 그 지점에 맞아떨어져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찾아온다.
처음 곡을 선택을 하고, 그 곡에 대해 들어보고 음악을 귀로 듣고, 작곡가와 배경을 글로 공부를 해도 내가 직접 음을 누르고 내가 친 음악을 스스로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무엇을 얼마큼 해야 할지 모르고 처음 연습을 시작한다. 들었던 음악이 아닌, 내가 악보를 보고 생각하는 음악의 해석을 하며, 내가 어떤 부분이 모자라고 어떤 방법으로 연습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음악을 완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점이 처음 시작에는 높지 않다가 연습을 하면서 이 음악의 완성도를 어떻게 잡아야 하고, 내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하며 그 지점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데, 그 시간이 참 더디게 흘러간다.
완성된 음악을 듣고 곡을 결정하고 그 악보를 처음 접한 후 구간 구간 작은 아티큘레이션부터 쪼개서 연습을 하게 되는데,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완벽한 음악을 들으며 흘려보냈던 그 자연스러운 음악의 흐름이 얼마나 많은 작은 디테일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처음 접하게 되는 그 순간, 그때 일단 1차 멘붕이 항상 온다. :)
슬럼프는 스스로 목표하는 지점이 뚜렷해지고 높아졌을 때 온다. 그리고 그 지점은 내가 지속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열심히 노력했을 때 온다고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뒤로는 나는 슬럼프가 오면 “왔구나” 하고 반기게 되었다. 드디어 올게 왔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때는 나를 위해 쉬고, 생각을 정리한다. 다시금 뒤를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진다.
슬럼프를 즐기게 되는 순간이다.
이 슬럼프를 잘 겪어내면 분명 난 더욱 성장해 있다. 학생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매일 같은 하루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학생 친구들은 나와 똑같이 항상 슬럼프가 오는 순간이 생긴다. 물론 겪어내는 중에는 심적으로나 더한 경우에는 육체적인 부분까지 무리가 오며 매우 힘들다. 잘 겪어내면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언제나 흔들리게 마련이다.
앞이 보이지 않기도 하고, 그러한 스트레스가 건강으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멘탈을 잡기 위해 스스로 최면 걸 듯 이야기한다.
"올 게 왔다. 난 열심히 살았고, 곧 껍데기를 한 꺼풀 벗기고 더욱 성장하기 전이다. 가장 힘을 내야 할 때이다. 지금이다!"
나의 슬럼프는 내가 더욱 성장하기 바로 직전에 온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갈림길에 들어서 스스로 더 나은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다. 슬럼프를 겪어내는 친구들이 이러한 생각으로 힘든 시기를 극복해내길 바란다.
오늘의 곡 소개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2. Adagio sostenuto
러시아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 1번을 크게 실패한 뒤 상당한 슬럼프에 빠져 다시는 곡을 작곡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가 있었다. 이때 라흐마니노프는 정신과 의사인 "니콜라이 달"에게 최면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받았던 치료법 중 하나가 니콜라이 달이 라흐마니노프를 만나서 항상 이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말은 라흐마니노프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당신은 당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쓸 것입니다. 당신은 아주 잘 해낼 거예요. 협주곡은 정말 훌륭한 곡이 될 것입니다."
최면에 가까운 그의 이 치료법은 실제로 라흐마니노프를 세계적인 명성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준 그의 협주곡 2번을 작곡하게 해 주었다. 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은 특히 한국인에게 매우 사랑받는 곡 중의 하나이다.
총 3개의 악장을 가지고 있는 이 곡 중 너무나 낭만적인 선율을 들려주는 2악장을 함께 들어보려고 한다.
그의 회복된 마음이 담긴 사랑스러운 2악장을 들으며 우리도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힘을 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세이지 오자와 지휘의 보스턴 심포니와 피아니스트 치머만의 연주 앨범이다.
Concerto : 협주곡
오케스트라와 독주 악기가 함께 어우러져 연주되는 음악 형식을 이야기한다.
보통 총 3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제 악장 1악장과 느린 악장 2악장 빠른 악장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Concerto는 작품 번호가 쓰일 때 항상 앞에 독주 악기가 함께 붙는다.
ex) Piano Concerto / Violin Concerto / Cello Concerto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