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봄바람 떡
우리家한식 2020 한식문화 공모전
날카로운 저 소리 6년째 듣고 있는 소리다.
이제는 소리가 울리기 전에 먼저 깨어서 소리가 나길 기다린다.
소리에 눈을 뜨면 몸이 익숙하다는 듯 자동적으로 냉동실 문을 연다. 줄 맞추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곳에서 돌같이 딱딱한 떡을 두 개 꺼내 찜기 냄비에 올린다. 서울에서 자취를 한 지 6년. 아마 내가 먹은 쑥만 해도 김해평야 정도는 될 듯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산골에서나 먹을 것 같은 이 쑥개떡이 서울 한복판 나의 냉장고에 줄지어 있게 된 것은 나의 외할머니 손으로 거슬려 올라간다. 외할머니께서는 봄날 엄마가 직장 가시고 나면 아직 찬바람에 얼굴이 시려 울 때부터 나를 데리고 들판을 다니시면서 "햇동아, 이거 잘 봐라이 요게 할머니 생명을 구해준 거라이" 하시며 차가운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쑥을 조심스럽게 뜯곤 하셨다. 그 쑥은 우리 집 된장국으로도 변신하고 아빠가 좋아하는 부침개나 엄마가 좋아하는 하얀 쌀가루를 묻힌 눈꽃 떡으로도 만들어졌다. 그것도 부족해 봄날 내내 나를 데리고 다니며 뜯은 쑥은 방앗간에 가서 큰 덩어리로 만들어 냉동실에 꽉꽉 채워놓고 1년 내내 나의 간식으로 주셨다.
꼬마였을 때부터 먹어서인지 피자와 치킨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도 얘는 거부감이 없다. 얼핏 보면 풀 같은 이 쑥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 할머니들은 어떻게 아셨을까?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외할머니와 나는 컴컴한 부엌에 앉아 쑥개떡을 만들곤 했다. 정성껏 만드는 할머니와 다르게 나는 동물 모양도 만들고 세모, 네모, 동그라미도 만들었다. 손가락 자국이 꾹꾹 나고 희끄무레한 색으로 모양 없는 반죽을 쪄도 뚜껑을 밀어내는 김이 술술 나오고 나면 초록색으로 맛있는 떡이 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어려서는 할머니와 노는 것으로, 좀 더 커서는 직장생활에 지친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할머니와 나는 열심히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쑥 욕심이 많으셔서 혹, 누가 먼저 뜯아 갈까 봄만 되면 나를 데리고 산과 들로 작년의 기억들을 더듬어 쑥을 쫓아다니셨다. 10년을 나와 함께 산 할머니 탓에 나의 어린 시절 모든 기억들은 외할머니 함께였다.
외할머니께서 이렇게 쑥을 보물처럼 여기는 것은 가난한 어린 시절 배고픔을 달래주는 유일한 식량이었기 때문이었다. 먹지를 못해 배가 허리에 붙을 때쯤이면 얼었던 땅에서 파릇한 쑥이 나오고 그 쑥을 뜯어 큰솥에 넣고 보리 쌀 한 줌을 넣고 온 가족이 배고픔을 채웠다고 하셨다. 파란 쑥 사이로 어쩌다 보리쌀이 보이면 할머니는 아까와서 입안에 한참 물고 있었다고 하셨다. 외할머니 가족만 어려우셨던 것이 아니라 그때는 다들 배고픔이 있었던 시절. 5살부터 할머니는 먼 곳으로까지 가서 가족들의 식량인 쑥을 구해왔어야 했다. 칼 날 같은 봄바람에 얼굴은 트고 할머니 손등도 바람과 흙에 터져서 피까지 났었지만 쑥을 많이 캔 날은 가족들이 먹을 것이 생겼다는 기쁨에 아픈 줄도 몰랐다고 하셨다. 한 번은 같이 간 동네 아이들을 따돌리고 더 많이 캐려고 깊은 산속까지 들어갔다가 산짐승을 만나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어렸을 적 배고픔에서 가족을 구해준 때문인지 할머니의 쑥 사랑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할머니와 가족이 나들이를 간 날도 엄마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고 얘들아 여기 쫌 세워라 저것 좀 봐라 저 쑥 아까와서 어쩌냐?"
기어이 차에서 내려 나들이 옷을 버리며 내가 먹었던 과자봉지에 손가락에 파란 물이 들면서 뜯으셨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축복받은 거라는 말씀도 꼭 하셨다. 우리 조상이 가난과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것은 조상들이 후손들이 굶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쑥이 천지사방에 있다는 외할머니의 논리다. 온 천지가 가뭄에 땅이 쩍쩍 갈라져도, 산불이 나 풀 한 포기 없는 곳에서도 홍수로 모든 것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곳에서도 기적처럼 신기하게도 쑤욱 올라왔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때를 가리지 않는 쑥사랑에 큰일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저수지 근처로 외출을 나갔는데 외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가족들이 찾아보니 외할머니께서 저수지 물 바로 옆에서 비스듬한 자세로 무언가 열심히 캐고 계셨다. 봄이라 바람이 엄청 심해 외할머니의 머리카락과 옷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몸도 흔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아찔한 상태였다. 엄마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그 날 저녁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집에 와서도 한참을 계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 국은 외할머니 목숨의 위험함을 대신한 쑥 된장국.
태어나면서부터 외할머니 손에 큰 나는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가장 맛있는 줄 알았다. 봄이 되면 나를 데라고 산으로 들로 다니시던 외할머니께서는 지금 안 계신다. 그런데도 서울 자취 생활하는 나에게 이 쑥개떡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엄마 때문이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엄마는 하얗게 김을 올리며 몽글몽글한 그 쑥 버무리와 쑥 된장국 1년 내내 찜기에 먹었던 그 맛을 잊지 못하셨다. 세월이 많이 흘러 쑥이 건강식품이 되면서 예전처럼 쑥을 흔하게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는 예전 할머니처럼 쑥을 구하기가 자유롭지도 못하셨다. 결국 엄마의 향수병에 아버지께서는 교회 분 야산에 쑥을 좋아하시는 분들과 함께 쑥밭을 만드셨고 해마다 봄이 되면 새벽에 쑥을 채취하러 가신다. 물론 나도 취준생의 이 힘든 생활이 끝나면 1년의 큰 행사인 봄 새벽의 그 쌉싸라한 동행에 할 것이다. 그 야산의 쑥으로 우리 가족은 1년 먹을 만큼의 충분한 쑥을 얻고 외할머니와 함께 어두운 부엌에서 힘들게 만들지 않아도 모양 좋게 방앗간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나는 아침 대신 이 쑥개떡을 먹고 엄마는 커피와 함께 쑥향을 즐긴다는 것이다. 해마다 봄은 와도 바람 부는 봄 들판을 외할머니와 함께 쫓아다니는 꼬마와 할머니는 없지만 우리 집의 음식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취준생의 이 지루한 생활에서 내가 그래도 아직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봄날 외할머니와 다녔던 그 들판과 늘 꾸부정한 모습으로 나와 엄마를 위해 칼바람을 맞으며 해 주셨던 쑥 음식의 사랑이
아침마다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흘러 나의 아이들도 금세 이 맛에 익숙해지고 봄바람께 함께 쑥을 찾아 다닐것이다. 그 예전 외할머니께서 우리 조상이 축복받은 값으로 얻어진 이 쑥을, 우리의 할머니 그 위의 할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집안의 음식으로 물흐르듯.